세계 첫 블록체인 기반 저널리즘 프로젝트 시빌(Civil)의 암호화폐 공개(ICO) 실험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목표에 한참 못 미치는 금액으로 마감해 전액 환불해줄 위기에 처했다.
그 동안 시빌에 쏟아진 관심을 감안하면 예상 밖 결과다. 시빌은 지난 해 출범할 때부터 언론의 엄청난 관심을 받아왔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많은 주류 언론들이 블록체인 기반 저널리즘 프로젝트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관심 덕분에 돈과 인력이 몰려 들었다. 미국 공영방송 NPR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비비안 실러까지 합세했다.실러는 뉴욕타임스, CNN, NBC뉴스 디지털 부문을 이끈 거물급 언론인이다.
전통 언론들의 제휴 요청도 쇄도했다. AP, 포브스 같은 유력 언론사들은 시빌의 블록체인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포브스는 아예 시빌 플랫폼에 뉴스룸을 개설하기로 했다.
지난 해엔 투자도 받았다.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 컨센시스로부터 500만 달러를 유치했다. 덕분에 벌써 뉴스룸도 15개 가까이 출범시켰다. 이쯤되면 블록체인과 저널리즘의 행복한 만남이라고 부를 만했다.
■ ICO 주체는 뉴스룸 아닌 비영리단체 시빌재단
이런 관심을 등에 업은 시빌이 지난 9월17일 CVL이란 암호화폐 공개(ICO)에 들어갔다. 시작 전 시빌은 2천400만 달러 유치를 목표로 한다고 공언했다. 또 유치 금액이 800만 달러를 밑돌 경우엔 전액 환불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마감된 ICO 결과는 참담했다. IT 매체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시빌은 총 1천12명에게 143만5천491달러 어치 CVL을 판매했다. 환불 마지노 선인 800만 달러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런데 내역을 살펴보면 더 참담하다. ICO 자금의 80%인 110만 달러는 컨센시스가 투자한 금액이다. 결국 투자사가 매입한 지분을 빼면 34만 달러 수준에 불과하단 계산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시빌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다우존스 같은 전통 언론사 뿐 아니라 악시오스 같은 언론 스타트업에도 ICO 참여를 독려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시빌의 ICO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시빌의 ICO는 언론들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만큼 입소문을 많이 탔다. 그런데도 왜 대실패로 끝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시빌이 왜 CVL이란 암호화폐를 발간했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CVL은 단순히 시빌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발행된 암호화폐가 아니다. 실제로 이번 ICO는 시빌 미디어 컴퍼니가 아니라 비영리기구 시빌재단(Civil Foundation)가 주도했다. 파퓰러(Popula)나 슬러지(Sludge) 같은 시빌 뉴스룸 운영 자금 마련을 위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단 얘기다.
시빌이 ICO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 이런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ICO 실패가 장기적인 비전 공유 측면에선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아닌 상황이다.
■ 지나치게 복잡한 토큰 구매 절차도 악재로 작용
그렇다면 CVL의 용도는 뭘까?
테크크런치에 따르면 시빌은 CVL을 발간한 뒤 크게 세 가지를 추진할 계획이었다. 워드프레스용 블록체인 출판 플러그인, 시빌 공동체 거버넌스 애플리케이션인 시빌 레지스트리, 그리고 비 블록체인 개발자를 위한 시빌용 앱 개발 툴이 바로 그것이다.
CVL은 당장 필요한 운영 자금보다는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의 근간을 구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단 얘기다. 따라서 시빌의 ICO 실패가 곧바로 자금난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CO 실패는 시빌에겐 적지 않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폭발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작 참여한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더버지를 비롯한 외신들은 일단 시빌에 대해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컸다고 꼬집었다. 뒤집어 얘기하면, 시빌의 홍보 실패란 의미도 된다.
실제로 시빌 출범 직후부터 “뭔가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 데 정확하게 뭘 하겠다는 건지, 다른 저널리즘 프로젝트와 어떻게 다르다는 건 지 잘 모르겠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명확한 개념을 전달하는 데 실패하면서 잠재 투자자들의 지갑을 열 지 못했단 얘기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CVL 판매 절차도 ICO 실패 주범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니먼랩은 지난 달 “CVL 토큰 구매를 시도한 결과 44단계나 거치도록 돼 있었다”고 꼬집었다. 블록체인에 익숙한 사람조차 쉽게 구매하기 힘든 구조로 돼 있었단 지적이다.
시빌 측이 ICO 마감을 앞두고 부랴부랴 현금으로 살 수도 있도록 바꾸긴 했지만, 투자자들의 관심을 되돌리는덴 실패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저널리즘을 구하겠다는 시빌의 홍보 전략이 독자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뉴스 생태계는 상당한 위기를 겪고 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가짜뉴스 유포가 극성을 부리면서 신뢰도도 떨어졌다. 여기에다 미국에선 러시아 해킹 파문까지 겹쳤다.
시빌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위기에 처한 뉴스 생태계를 구하겠다는 숭고한 야심을 내걸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빌의 이런 야심을 ‘잘못된 기술 유토피아’로 치부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 "과연 시빌이 협업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블록체인 전문 매체 브레이커의 비판은 좀 더 통렬하다. 불편부당한 뉴스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시빌의 야심이 제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진실된 뉴스’가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춘 편향된 뉴스’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빌에서도 플랫폼 통제를 놓고 치열한 정파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숭고한 이상을 위해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시빌의 야심에 많은 사람들이 별로 공감하지 못했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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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시빌이 야심적으로 시도했던 ICO는 실패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시빌의 실패는 암호화폐 기반 보상시스템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시빌은 좀 더 개선된 방법으로 또 다시 ICO를 시도하겠다고 선언했다. 과연 새롭게 내놓을 시빌의 ICO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있을까? 시빌의 실패한 ICO가 유난히 관심을 끄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