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성의 溫技] 이름만 ‘n번방 방지법’ 다시 생각해보자

사회적 합의 더 거쳐야

데스크 칼럼입력 :2020/05/19 09:50    수정: 2020/10/05 13:30

그리스신화에 ‘프로쿠르테스의 침대’라는 것이 있다. 프로쿠르테스는 여행자에게 침대를 제공할 때 여행자의 키를 침대에 맞추려했다. 키가 침대보다 크면 몸을 잘라내고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몸을 늘렸다. 프로쿠르테스에게는 침대가 기준이고 표준이었던 셈이다. 침대는 편견과 아집 같은 이성의 오류를 상징한다. 프로쿠르테스는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방송통신 관련 3개 법안 가운데 일부 법안의 경우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와 비슷하다. 입법 취지를 모르지 않으나, 실효성이 거의 없고, 오히려 엉뚱한 피해만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코 화급을 다투는 일도 아닌데 입법 주체가 성과주의에 빠진 탓인지 사회적 합의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 누군가는 부당하게 발목을 내놓아야 한다.

논란의 3법 중 'n번방 방지법'이 대표적이다. 'n번방 방지법'은 전기통신사업법과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의 별칭이다. 본래 법 이름은 일반인에게 익숙하지 않으니 내용의 골자로 별칭을 만든 것이다. 입법자 입장에서 봤을 때 별칭은 잘 지었다. 성범죄의 소굴과도 같았던 n번방을 방지하겠다는 데 반대할 시민이 누가 있겠는가. 실제로 대부분의 국민과 시민단체는 이 법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다.

이 법은 그러나 이미 국회를 통과한 또 다른 ‘n번방 방지법’과는 전혀 다르다. 1차 ‘n번방 방지법’은 성 범죄자에 대한 기준과 처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일부 개정된 구체적인 법은 ‘형법’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특례법’ ‘범죄수익의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등이다. n번방 사건으로 인한 파장이 워낙 컸기에 처벌 기준과 수위를 높이는 것에 거의 모든 사람이 쌍수를 들어 반겼다.

2차 ‘n번방 방지법’은 그러나 이름만 ‘n번방 방지법’이지, 실제로는 ‘인터넷 기업 족쇄법’이나 ‘시민 감시법’라고 부르는 게 더 옳을 수도 있다. 이 법이 통과된다 한들 이번에 문제가 됐던 텔레그램 n번방처럼 성범죄가 실제로 일어난 해외 서비스에 대해 우리 정부가 통제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이다. 서버가 해외에 있고 본사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며 우리 법이 미치지 못하는 탓이다.

이 법은 그래서 실제 문제가 되는 사이트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면서 국내 인터넷 기업만 구속하게 된다. '성범죄물 유통을 방지하는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어길 시 3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며, 사업을 폐지할 수도 있다’는 게 골자인데, 이는 사실상 인터넷 기업이 ‘빅브라더’처럼 네티즌 행위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감시하라는 말에 다름 아닌 거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시민 감시 논란과 관련해 ‘사업자의 유통 방지 의무는 일반에 공개되는 정보에만 해당하며 사적 대화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명했으나 되레 더 혼란스럽다. 대부분의 성범죄물은 사실상 n번방처럼 비밀 채팅을 통해 유통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무가 없고 공개된 정보 감시만 의무에 해당된다면 도대체 어떻게 n번방을 방지하겠다는 것인가. 입법의 취지가 무색해진 것 아닌가.

성범죄에 강력히 대처하고 싶은 정부의 선의를 모르는 바 아니고 그 선의를 존중한다. 대부분의 국민이 그럴 것이다. 특히 “텔레그램 못 막는다고 해서, 모든 불법까지 방치해야 하나”라는 충정을 이해하며 정책 수립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그런 선의가 엉뚱하게 다른 분야에 커다란 폐해를 낳는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마음 급하다고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수는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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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에겐 익숙하지 않지만, '데이터센터 관리법'이라는 것도 이 시점에 과연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봤으면 한다. 이 법은 방송통신발전기본법 개정안을 말한다. 민간 데이터센터(IDC)도 국가재난관리시설로 지정하겠다는 게 골자다. 재난시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민간에 대한 재산권 침해의 소지가 엄연하고, 정부가 ‘빅브라더’가 되어 민간 IDC를 들여다본다는 오해를 살 여지도 충분하다.

법을 침대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프로쿠스테스적’이어서는 안 된다. 안락하고 평화로워야 할 침대가 폭력적인 흉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게 국민 세금으로 사는 공인의 자세일 수는 없다. 법은 그래서 요금인가제처럼 시대의 변화로 불필요해진 규제를 풀 때는 신속해야 하지만, 누군가의 손발을 묶을 때는 최대한 신중해야 하고 반드시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