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성의 溫技] 정부와 삼성한테 싸움을 부추기지 마라

이재용 사과의 의미

데스크 칼럼입력 :2020/05/07 16:34    수정: 2020/10/05 13:31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5.6 선언’은 한국 기업사에 커다란 변곡점으로 기록될 듯하다.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에서 기업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이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지금까지 기업은 ‘사유 재산’으로만 인식돼왔다. 하지만 ‘5.6 선언’ 이후 기업은 ‘사유 재산’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자산’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크게 확산될 것이다. 인식의 대전환이다.

기업도 ‘사회적 자산’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사회에서 태어났고 사회에서 커왔으니 사회적 자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거에도 이런 인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런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소수였다. 대다수의 생각은 달랐다. 기업에는 특정 주인이 있고 그가 절대 권력을 가져도 좋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그게 창업자 프리미엄이고 그 권리는 대를 이어 전해진다는 믿음이 대세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오후 경영권 승계와 노동 문제 관련 대국민 사과를 마친 후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사진=뉴시스)

‘5.6 선언’은 그 인식론적 대세를 전복(顚覆)시키는 물꼬다. 삼성이 어떤 기업인가. 세계 1등 기업이고 대한민국 최대 기업 아닌가. 그런 기업의 총수가 ‘자식한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를 잇는 창업 가문의 절대 권력을 해체하겠다는 의미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가문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모종의 작업을 해야만 하는 다른 재벌 기업에겐 지축이 뿌리째 흔들리는 일일 거다.

이 부회장이 왜 이런 선언을 했는지 그 속을 다 알 수는 없다. 온갖 분석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기업에도 ‘사유 재산’의 영역과 ‘사회적 자산’의 영역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이 부회장이 선언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다. 그 이유와 배경이 무엇이든 그 사실 자체가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바뀌었다는 사실은 왜 그 자체로서 중요한 일인가. ‘5.6 선언’과 그 이행은 국가와 사회와 삼성 모두에게 이로운 최선의 선택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5.6 선언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삼성은 사회와의 불필요한 대립을 끝내고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고 그 자체로 국부(國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 위기 속에 그보다 더 나은 대안이 뭐가 있겠는가.

‘5.6 선언’ 그 자체의 엄중한 사실성을 평가하기보다 그 이유와 배경을 따지며 내놓는 양극단의 두 가지 분석을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해석 또한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당파성에 매몰돼 정부의 ‘포스트 코로나19’ 대응과 '뉴(New) 삼성'의 앞길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탓이다. 두 견해 다 정부와 삼성을 대결시키는 나쁜 결과만 초래한다.

‘삼성 항복론’은 오른쪽 극단에 치우쳐 ‘5.6 선언’의 진정성을 믿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삼성을 싫어해서 공격한다는 망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정부가 삼성을 끊임없이 공격하기 때문에 삼성이 결국 굴복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그릇된 정책에 맞서 싸워야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과연 그게 사실이고 또 옳은 전략일까.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국난 극복을 위해 힘을 합칠 때가 아닐까.

‘면피 꼼수론’은 왼쪽 극단에 치우쳐 ‘5.6 선언’의 혁신성을 외면한다. 이 선언은 단지 이 부회장의 인신 구속을 면하기 위한 거짓말일 뿐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세상엔 검거나 흰 두 가지 밖에 없다는 좁은 시각 탓이다. 병은 꼭 수술 칼로만 고치는 게 아니다. 방법은 많다. 그 방법을 잘 연구하는 게 혁신이다. 병 고치는 것보다 칼 쓰는 데만 몰두한다면 그건 선무당이거나 돌팔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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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극심해진 경제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문재인 정부와 글로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할 삼성은 서로 싸울 이유도 없고 싸워서 득이 될 것도 없다.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춰 서로 혁신하며 돕는 게 최선이다. 물론 삼성만 그런 게 아니다. 정부와 모든 기업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보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국민과 소비자를 위한 길이다. 시대적 요청인 것이다.

두 극단을 경계하는 것은 그 결과가 정부와 기업을 이간질시키기 때문이다. ‘5.6 선언’은 경영권 불승계만 담고 있는 게 아니다. ‘노동 3권 보장’과 ‘철저한 준법 경영’ 그리고 ‘지속적인 기술 혁신’ 등 삼성이 그동안 지적받아왔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원칙을 담고 있다. 이 부회장과 삼성이 사회와 정부에 내민 연대의 손길인 셈이다. 이간질로 이를 뿌리쳐 득이 될 게 단 하나라도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