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지난달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시대 산업유산을 소개하는 ‘산업유산 정보센터’를 도쿄에 개관했다.
정보센터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노역을 한 조선인이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증언 등이 소개돼 양국사이에 또 다시 역사 왜곡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를 비롯한 강제노역시설 7곳을 포함한 일본 근대산업시설 23곳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당시 사실관련 논란이 일자 일본은 일부 시설에 조선인 등 주변국 국민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아래 강제 노역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정작 개관한 정보센터를 보니 당시 약속은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고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일본에는 ‘대본영 발표’라는 고유명사가 있다.
대본영은 일본 육군 전쟁지휘부를 뜻한다. 오늘날 대본영 발표는 ‘정부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는 의미로 바뀌어 정부 발표를 비꼬는 단어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전쟁 지휘부였던 일본 육군 대본영은 전쟁에 패해 퇴각을 할 때 마다 일본 국민에게 대일본 제국군대가 용감하게 ‘전진(轉進)’하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마치 승리해 진격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했다.
본래 전진이라고 하면 한자로 ‘前進(젠신)’이라고 쓰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대본영은 교묘하게도 ‘轉進(덴신)’이라는 단어를 창조해 국민을 호도했다.
물론 일본국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본인이 속았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대본영 발표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환호했다.
대본영은 전진(前進)이라고 한 적 없고 전진(轉進)이라고 했기에 사실관계만 따지자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할 소지는 있다.
얼마 전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한국인이 일본에 입국할 때 2주간 자가 격리하라는 조건부 입국 절차를 실시하면서 한국인의 일본 입국비자발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사전에 협의가 없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일본 정부는 사전에 한국 정부와 상의를 했다고 전했지만 우리 정부는 그런 사실이 없다면서 반박성명을 냈다. 여기에 일본 정부는 또다시 반박 성명을 내는 등 사실 확인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과연 일본 정부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럴 것이라고 본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의 합의과정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 가능한 함정을 파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에 패해서 후퇴하는 것을 전진(轉進)이라고 속이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들의 이러한 습성을 철저히 꿰뚫어야만 우리가 속지 않을 수 있다.
태평양전쟁의 참혹한 패전을 맞이하고도 태연하게 말장난을 구사하는 일본 정부와 이런 말장난에 무지한 일본 국민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여실히 보고 있지 않은가.
당시 일본과 지금 일본 지도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언론을 장악하고 국민을 호도하는데 여념이 없다.
올림픽 개최 연기가 확정 발표되기 전까지 하루에 수십 명 단위로 발생했다던 확진자는 올림픽 연기가 공식 확인되자마자 하루 이틀 사이에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요 며칠 하루 평균 확진자가 200명을 넘어 300명에 이르고 있다. 유명 스포츠 선수 확진자도 줄줄이 나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국가적인 긴급사태 발령 검토를 언급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도시봉쇄니 하며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일본 정부는 전혀 사실을 호도한 것이 아니며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도할 뿐이라고 적극 변명 중이지만 적어도 이들의 변명을 액면 그대로 믿어주는 외국인은 없는 듯하다.
한국과 일본은 참으로 달라도 한참 다른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을 연구하다 보면 옳고 그름을 떠나 상식이 다르다고만 이야기 할 수 없는 현실을 너무 많이 목도하게 된다.
문화인류학자 루스베네딕트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국 정부로부터 ‘일본을 지배하기 위해 일본인을 연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저술했다는 ‘국화의 칼’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무척이나 호전적이지만 동시에 평화적이고,
불손하면서도 예의 바르며,
완고하면서도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친절하지만 한없이 잔인하며,
무척 성실하지만 한편 불성실하기도 하며,
용감하기도 하지만 비겁하기도 하며,
보수적이지만 한없이 진보적이기도 하다.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모를 때는 아주 쉽게 범죄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민족이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들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가깝게 지내려고 해도 가깝게 지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웃과 사이가 안 좋으면 이사가면 되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일본과 사이가 나쁘다고 해서, 신뢰관계가 없다고 해서 이사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나라이니 멀리할 수도 없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태평양전쟁 이후에 미국이 그러했듯이 우리 잣대로 이들을 재단하고 정면으로 다투기보다는 이들의 사고회로를 정확히 파악해서 지혜롭게 상대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더 열심히 일본을 연구해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어떻게 저들을 상대해야 양국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과거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정부의 몽니는 차치하고라도 저들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과거사 청산에 응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우리 측 대응에 문제는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 살면서 정보화 컨설팅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한일관계 개선에 대해 늘 고민한다.
요즘처럼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는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양국 정치가 교류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외교적으로 심각한 마찰이 있었던 중일관계를 원만한 관계로 만들어 놓은 중국 외교부의 대일외교를 살펴보고 우리 외교 현실을 들여다보면 한다.
지난해 5월 청융화 주일중국대사 이임식이 있었다. 이임식 후 열린 파티에는 아베 총리를 포함, 일본 정관계 인사가 발 디딜 틈 없이 참석해 중일관계의 돈독함을 표시했다. 청 대사의 이임을 아쉬워하는 자리였지만 한편으로는 청 대사가 일본에서 구축한 정재계 화려한 인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과연 그는 어떤 배경의 사람이기에 일본 정재계를 두루 섭렵하며 일본에서 활약을 했을까. 그의 프로필을 살펴보니 궁금함이 순식간에 해결됐다.
청 대사는 중국 길림성 출신으로 초등학교 3학년에 창춘외국어학교 일본어코스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웠다. 1973년 외교관 연수생 신분으로 일본 와코대학과 소카대학에서 학창생활을 보냈다. 또 1977년부터 2000년까지 3회에 걸쳐 12년간 일본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2010년 2월에 주일중국대사로 부임해 2019년 5월까지 9년을 근무했다. 외교관 생활 가운데 20년을 일본통으로 일본 정부와 중국 정부를 잇는 활약을 했다.
그가 재임한 기간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마찰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센카쿠열도 근처에서 일본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중국어선이 충돌, 일본 정부는 중국인 선장을 체포했고 곧바로 센카쿠열도를 매입해 국유화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반일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거리에는 일장기가 불타고 일본 자동차가 파괴되고 일본 상점이 방화되는 등 양국 관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하지만 지일파인 청 대사는 일본에 있는 친중파 인맥을 총동원해 양국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을 거듭했다. 그 결과 오늘날 일본과 중국은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청 대사 후임인 쿵쉬안유 대사는 10년 이상을 일본에서 근무했다. 전임자인 왕위 중국 외교부장도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외교부에서 일본관계전문가로 활약했고 2004년부터 3년간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중국의 일본 외교라인을 보면 명실공히 일본전문가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일본외교를 들여다보면 왜 한일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지 답이 보인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시절 18대 권철현 대사부터 24대 남관표 대사까지 7명 가운데 정통외교관료 출신은 신각수, 이준규, 남관표 세 사람 뿐이다. 세 사람의 일본 근무경력도 신각수 대사가 2회 5년, 이준규 대사도 게이오대 방문연구원 외 2회, 남관표 대사가 1회 약 3년 정도로 지극히 짧은 기간임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적어도 이 세 나라는 우리나라에 무척 중요한 국가다. 외교적으로도 민감한 사안이 많다. 특히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포함해 난제가 산적해 있다. 그렇다면 더욱더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인사정책이 필요하다. 주재국 언어 구사능력과 정재계 폭넓은 인맥을 가진 외교관이 상대해야 한다. 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
외교란 국가이익을 둘러싼 총성 없는 전쟁터가 아닌가. 대화를 통해 상대 국가와 자국 이익을 위해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면 적어도 외교관은 주재국 언어와 문화에 정통한 전문가가 담당해야 한다. 그간 외교관 인사정책 추이를 보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인사, 혹은 보은인사가 아니었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물론 어느 정도 직책 이상이 되면 본인이 반드시 주재국 언어에 능통해야 할 이유도 없고 외교적 전문성이 부족해도 충분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각국 대사관에 부족한 부분을 메울 인재를 충분히 배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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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직업외교관 중에서도 각국에 정통한 인재들이 적지 않다. 내가 만나본 외교관들 중에는 일본 근무경험이 많고 일본에 해박하며 정재계 인맥을 보유한 일본 전문가도 많다.
손자병법의 기본중의 기본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이제 일본을 제대로 알고 그들과 멋진 논쟁을 벌일 수 있는 외교관이 대일 외교에 다수 포진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외교를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