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 2차조사 결과 원인이 '배터리 결함'으로 일단락되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 전반에 후폭풍이 몰려들고있다.
조사단의 발표에도 ESS 시장의 불확실성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당장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 청구와 더불어 ESS 외에 다른 배터리 사업전략에도 직간접적인 피해도 예상된다.
2차 조사 발표를 통해 반등을 꾀하던 배터리업계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다는 분위기다. 한 때 '제2의 메모리'라고 불리며 기대를 모았던 배터리 업계 실적은 ESS 화재에 따른 여파로 발목을 잡힌 상황이다. 세계 ESS 배터리 시장에서 6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기록 중인 양사의 글로벌 전략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 "문제는 배터리야"…업계 한숨 소리 커졌다
지난 6일 민관합동 ESS 화재사고 조사단은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ESS 화재원인에 대해 배터리를 문제삼았다. 5건의 화재 중 4건에서 배터리 결함이 화재로 이어졌다는 게 결론이다. 정부가 꾸린 조사위원회가 ESS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배터리를 지목한 것은 처음이다.
1차 조사 이후 각 설비에 필수적으로 탑재된 블랙박스가 단초가 됐다. 조사단 공동단장인 김재철 숭실대 교수는 브리핑에서 "1차 조사 때와 달리 배터리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 추정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시스템·배터리 운영기록 등 현장자료가 남아있어 그를 기반으로 배터리가 발화점이라 추정한 것. 조사가 진행된 지난해 5개 화재 외에도, 2017년부터 발생한 23건의 화재의 원인 역시 배터리 결함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측도 가능해졌다.
배터리 업계는 이미 지난해 한 차례 ESS 화재 여파로 휘청거렸다. 국내 수주가 끊긴 점도 문제였지만, ESS 화재에 따른 안전대책에 상당한 비용이 투입됐다. LG화학은 ESS 충당금으로 3천억원을, 삼성SDI는 2천억원을 적립했다. 이 비용은 지난해 4분기 실적에 반영됐다. LG화학은 처음으로 분기 영업손실을 냈고, 삼성SDI도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이 90% 이상 줄었다. 2차 발표 이후 안전대책에 추가 비용이 투입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반전될 가능성도 요원하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발표로 피해업체들이 배터리 제조사를 향해 도미노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불거졌다"며 "앞서 작년 7월에도 한 보험사가 LG화학을 상대로 구상권 청구소송을 제기한 전례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는 1차 조사위가 배터리를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배터리 자체가 원인이라고 밝혀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진단이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 설치된 ESS 용량은 3.7기가와트시(GWh)로 전년에 비해 34%나 감소했다. ESS에 탑재되는 배터리는 중대형 제품으로 LG화학과 삼성SDI가 대부분을 공급해왔다. 그러나 잇따른 사고와 부실한 사후대책으로 ESS 시장 자체가 쪼그라들었고, 지난해 이후로 신규 투자는 '제로(0)'에 가깝다.
ESS 시장 성장속도가 점차 둔화하는 것은 전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정부가 재생에너지 정책에 속도를 내면서 시장이 초기에 급성장했다가 연이은 화재로 열기가 빠르게 식었다는 평가다. SNE리서치는 '글로벌 ESS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 중장기 전망' 보고서에서 한국 시장을 꼽아 "정부 시책으로 초기에 빠르게 개화한 탓에 향후 성장세가 둔화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 해외시장 불똥 튈라 '노심초사'
이에 업계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일단 시장을 선점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번 발표로 해외 영업에도 불똥이 튈 우려가 생겼다. LG·삼성 배터리의 신뢰도에 흠집이 갈 우려도 있고, 국내 위주로 안전성 강화 대책을 적용하면 해외 사업자들의 반발이 거세질 수도 있다. 중국과 미국 등 후발주자들의 추격 속도도 빠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한 관계자는 "외신 위주로 해외 업계 반응을 살펴보고 있는데 아직은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라면서도 "해외로 눈을 돌린 상황에서 피해가 당장 눈에보이는 것보다 더 늘어날까봐 걱정된다. 같은 배터리를 써도 해외에서는 화재가 나지 않는데 배터리 결함 때문이라고 하니 불안감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배터리 뿐만 아니라 전체 ESS 생태계가 멈춰서면서 태양광·풍력 ESS 산업을 큰 축으로 하는 정부의 에너지전환 정책에도 먹구름이 꼈다. 안전성을 보강하기 위해 매번 추가되는 설치·운영상 규제가 신규 사업자의 진입 문턱을 지속적으로 높이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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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ESS가 필요한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산업에도 큰 타격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ESS는 발전시설이 생산한 에너지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보관함'이다. 발전량이 많을 때 저장했다가 사용할 수 있어 친환경 재생에너지와 주로 연계된다.
이와 관련해 한국경제연구원은 "할인제도 일몰 연장과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 가중치 확대 등으로 신규 사업자에게 투자 유인을 제공해야 할 것"이라며 "화재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고 해결책이 제시되기 전까지 감축운전 실시를 통해 화재사고를 억제하고 그 손실은 보전하여 정책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