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보다 더 흥미진진한 미국의 망중립성 공방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연방 vs 주 별도 입법 가능

데스크 칼럼입력 :2019/10/02 15:37    수정: 2019/10/02 21:39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미국의 ‘망중립성 이슈’가 또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워싱턴D.C 연방순회항소법원이 관련 판결을 내놓은 때문입니다.

이번 소송은 모질라를 비롯한 인터넷기업들이 연방통신위원회(FCC)를 상대로 제기한 겁니다. 유무선 인터넷사업자(ISP)들에게 부과됐던 망중립성 원칙을 폐지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FCC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던 2015년 ‘오픈 인터넷 규칙’을 통해 망중립성 원칙을 확립합니다. 통신법 706조 타이틀1(정보서비스)으로 분류돼 있던 유무선 ISP를 타이틀2(유선서비스)로 재분류한 겁니다. 타이틀2로 분류된 사업인 ‘커먼캐리어’ 의무가 있습니다. 차별금지, 차단금지를 골자로 하는 망중립성 원칙이 적용되는 겁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의 망중립성 폐지 조치에 반발해 항의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씨넷)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망중립성 원칙 폐기에 나섰습니다. 아짓 파이가 이끄는 트럼프 시대 FCC는 오바마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망중립성을 폐기합니다. ‘인터넷 자유회복’ 문건을 통해 타이틀2로 분류됐던 유무선 ISP를 다시 타이틀1으로 재분류해버린 겁니다.

■ FCC 재분류엔 문제 없어…미국 판례도 대체로 인정 분위기

모질라를 비롯한 주요 인터넷 기업들은 이 조치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합니다. 이번 소송 쟁점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FCC가 2년 만에 유무선 ISP 산업분류를 원위치 한 것이 자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조치인가.

둘째. FCC는 각 주의 망중립성 보장 법률 제정을 막을 권한이 있는가.

셋째. 망중립성 원칙 폐기하면서 공공 안전 같은 부분을 세심하게 따져봤는가.

연방항소법원은 FCC의 망중립성 폐지 조치 자체가 자의적으로 이뤄진 건 아니라고 판결했습니다. FCC는 인터넷이 DNS와 캐싱 서비스로 구성되기 때문에 ‘단순한 전송망’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유무선 ISP를 정보서비스로 재분류하는 것이 현재 기술 수준에 더 적합하다는 주장입니다.

아짓 파이 FCC 위원장 (사진=씨넷)

법원은 이런 논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테크크런치 같은 IT전문 매체는 이에 대해 “굉장히 솔직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법원이 FCC의 망중립성 폐지 조치를 그대로 수용할 것이란 점은 어느 정도 예상됐습니다. 미국 법원은 연방기관의 전문성을 전폭적으로 인정해 왔기 때문입니다. 타당한 이유만 설명하면 종전 규정을 변경할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FCC가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망중립성 원칙을 폐기했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은 소송을 제기한 쪽이 지게됩니다. 당연히 입증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만큼 FCC의 망중립성 폐지 조치가 무력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참고로 오바마 시절 FCC가 망중립성 원칙을 도입했다가 항소법원에서 패소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FCC가 패소한 건 규제 권한을 넘어선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쟁점은 FCC가 ‘산업 분류를 할 수 있느냐’는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이 2005년 이미 FCC의 산업 분류 권한을 인정한 판례가 있기 때문에 월권으로 보긴 힘들었습니다.

■ 항소법원 "각 주 입법 활동 포괄적 금지는 월권" 판결

그렇기 때문에 연방정부의 결정에 반하는 법률을 각 주들이 별도 제정할 수 있을 것이냐는 부분이 오히려 더 관심을 끈 쟁점이었습니다. FCC가 망중립성을 폐지한 직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주요 주들은 망중립성을 보장하는 별도 법률을 마련했습니다. 다만 법률 시행 시점을 FCC 소송이 마무리 된 이후로 연기해 놓은 상태입니다.

FCC는 2017년 ‘인터넷 자유회복’ 문건을 통해 각 주들의 별도 입법을 금지했습니다. 망중립성 폐지 원칙에 반하는 법을 만들지 말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 간의 권한 구분이 명확한 미국에선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번 재판에서도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 어떤 판결이 나올 지 더 관심을 끌었습니다.

연방항소법원의 판결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각 주가 망중립성 원칙을 보장하는 별도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고 판결한 겁니다. FCC가 각 주 정부의 그런 입법 활동을 규제할 권한이 없다고 본 겁니다.

물론 FCC가 아예 각 주의 입법 활동에 개입하지 못한다고 판결한 건 아닙니다. 다만 포괄적으로 별도 입법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권한은 없다는 것이 항소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5명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가운데가 아짓 파이 위원장이다. (사진=FCC)

따라서 FCC는 각 주들이 제정한 망중립성 보장 법률을 무력화하기 위해선 개별적으로 하나씩 따져봐야 합니다. 사실상 망중립성 보장 법률을 막기가 쉽지 않은 상황인 셈입니다. 각 주의 상황들을 놓고 공방을 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쟁점에서도 FCC가 사실상 패소했습니다. 이번 소송 원고들은 망중립성을 폐지할 경우 광대역 인터넷 사업자들의 망 차단이나 압박 조치 때문에 공공의 안전이 위협받을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지난 해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소방 헬기가 산불 진화작업 도중 버라이즌이 망 제어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망중립성 원칙이 폐기됨에 따라 이런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꽤 높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저소득층 요금 감면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통신법 706조 타이틀2로 분류될 경우 저소득층 요금감면 프로그램을 준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보서비스로 재분류되면서 유무선 ISP들은 이런 의무를 지지 않게 됐습니다.

연방항소법원은 FCC의 망중립성 원칙 폐기로 이런 부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에 따라 FCC에 그 부분에 대해 재검토해보라고 명령했습니다.

■ 항소법원 전원합의체 재심리 요청· 대법원 상고 절차 남아

판결 직후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항소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판결 결과를 꼼꼼하게 따져보면 FCC가 승리했다고 보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연방 정부 차원의 망중립성 폐지 조치가 주 정부의 법률 활동을 통해 무력화될 가능성을 열어놨다는 부분은 중요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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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번 판결로 망중립성을 둘러싼 소송이 끝난 건 아닙니다. 아직 두 가지 선택지가 더 남아있습니다.

우선 항소법원 전원합의체 심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연방대법원에 상고를 하는 쪽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양쪽 모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경우 소송은 계속 됩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