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사라진 아이폰11과 야구만화의 추억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현실 속 경쟁에 대하여

데스크 칼럼입력 :2019/09/11 11:24    수정: 2019/09/11 11:3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어린 시절부터 야구 만화를 참 좋아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마구와 완벽에 가까운 타자들에 열광했다.

마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이상무 화백의 ‘달려라 꼴찌’다. 이 만화엔 마구 휘어지면서 날아오는 드라이브볼,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더스트볼. 그리고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는 바운드볼 같은 3대 마구가 나온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무시무시한 강속구로 유명하다. 투수였던 오혜성은 시속 160km 공을 던진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게 패스트볼이 아니라 팜볼이다. 그것도 느린 화면으로 겨우 확인할 수 있다.

이상무 만화 '달려라 꼴찌'의 한 장면. 이 만화엔 드라이브볼이란 마구가 등장한다.

어깨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한 오혜성은 신출귀몰한 타격을 선보인다. 라이벌인 마동탁 역시 쳤다 하면 홈런이다.

만화에 푹 빠져 지내다 ‘진짜 야구’에 눈을 돌렸다. 그런데 너무 밋밋하고 시시했다. 160km 팜볼은 고사하고, 150km 패스트볼을 던지는 투수도 찾기 힘들었다. 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혜성이나 마동탁 같은 신비로운 선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선수들이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수준이었다.

상상계 속에 푹 빠져 있던 내가 ‘현실 속 야구 경기’에 흥미를 갖기까지 꽤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간극을 메워준 건, 그 무렵 응원하던 팀에 대한 무한 애정이었다.

■ 현실 속 '도토리 키재기'도 중요

“IT기자가 웬 야구 얘기?”라고 하실 분이 있을 것 같다. 애플의 아이폰11 3개 모델 공개 소식을 접하면서 불현듯 야구 만화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 생각났다.

아이폰11이 공개된 직후 외신들은 “혁신은 없었다”는 평가를 내놨다. 미국 유력 언론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실제로 그랬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처음 아이폰 공개할 때를 한번 떠올려보자. 당시 잡스는 그 무렵 유통되던 모든 스마트폰에 부끄럽게 만들었다. ‘터치방식 인터페이스’와 ‘가상 키보드’는 사람들의 상식을 부수는 파괴적 혁신이었다.

야구 만화에 비유하자면, 밋밋한 직구나 커브로 승부하는 세계에 드라이브볼 같은 현란한 변화구를 들고 나온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160km 커브를 던지는 투수의 등장에 비유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스마트폰 시장은 엄청나게 상향 평준화됐다. 한 때 ‘만화속 사기 캐릭터’에 비유됐던 아이폰은 이제 고만고만한 선수 중 하나가 됐다. 삼성 갤럭시 폰과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선두 자리를 다투고 있다. 최근 들어선 오히려 갤럭시폰이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애플 아이폰11에 탑재된 A13 바이오닉 칩셋.(사진=애플 유튜브 캡처)

이런 상황에서 “혁신이 없다”고 평가하는 건, 왜 현실 야구판에 독고탁이나 오혜성 같은 사기 캐릭터가 나오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준화된 세상에서 절대 영웅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놓고 아이폰11을 다시 살펴보면 눈에 띄는 점이 꽤 있다. 우선 카메라는 세 개가 탑재됐다. 디자인 때문에 ‘인덕션 아니냐’는 비아냥이 있긴 하지만 카메라 성능을 엄청나게 향상됐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A13 바이오닉 칩셋이다. 이 칩 덕분에 처리 속도는 대폭 향상되면서도 배터리 수명이 길어졌다.

애플도 아이폰11의 개선 사항 중 A13 칩을 강조했다. 아예 “아이폰11은 스마트폰 중 가장 뛰어난 머신러닝 플랫폼이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 그렇다면 아이폰11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뭘까

다시 만화 얘기로 돌아가자. 독고탁의 ‘더스트볼’도 결국 공략 당한다. 공이 보이지 않게 될 때의 경로를 기억했다가 그대로 타격하는 타자들에겐 속수무책이었다. 160km 팜볼을 던지던 오혜성은 스스로 무너졌다. 어깨가 감당을 해내지 못한 때문이다.

혁신이란 게 그렇다. 한 순간 반짝 할 순 있지만 지속 가능하게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니다.‘평준화된 시장에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게 현실 속 경쟁 문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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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점으로 아이폰11을 들여다보면 좀 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선된 성능들이 얼마나 뛰어난 지, 그리고 그 정도 성능 개선이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에 충분한 지 따져보는 게 좀 더 현실적인 분석이란 얘기다.

그래서일까? “아이폰11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은 가격이다”는 CNBC의 평가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어쩌면 올해 아이폰의 혁신은 그 부분에 무게가 실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