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일본의 백색국가 제외조치 강행에 맞서 내년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산업 관련 예산을 늘렸지만,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각종 환경규제가 국내 기업들의 기술경쟁력 확보를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 최대 수요처인 삼성전자가 이재용 부회장의 재구속 위기에 빠지는 등 산업계 전반으로 침체가 예상되고 있는 탓이다.
3일 대한상공회의소는 일본 기업과 거래관계에 있는 국내 기업 500개사를 대상으로 '일본 수출규제에 따른 산업계 영향과 대응과제'를 조사한 결과, 이들 기업 중 26.0%가 '화학물질 등록·관리 등 환경규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측은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해 일본 기업과의 거래관계에서 신뢰가 약화됐다고 응답한 국내 기업은 66.6%, 일본의 수출규제가 장기화될 경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응답은 55.0%에 달한다"며 "기업들은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과 관련해 연구·개발 세액공제 확대(37.8%), 대·중소기업 협력체계 구축(32.0%), 규제혁신(19.4%), 인수·합병 등 해외기술 구입 지원(10.8%) 등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고 전했다.
■ "기업 옥죄는 환경규제 풀어달라"
우리나라의 환경규제(화관법, 화평법등)는 세계에서 가장 강도높은 규제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고 대상인 화학물질은 기존에 사용했던 물질이나 새로 사용하려는 물질 모두가 신고 대상이며, 등록절차도 법률마다 달라 기업들은 관계 부처(환경부, 노동부, 고용부)에 각종 서류를 제출해야한다. 일본(화심법)과 미국(TSCA)이 새로 사용하려는 신규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신고를 의무화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화관법 상 사고대비물질 등을 취급하는 사업장은 장외영향평가서 외에 위해관리계획서를 별도로 제출해야 하는데 장외영향평가서와 위해관리계획서를 제출하는 경우, 법정 심사 기간만 최장 60일이 걸린다. 문제는 전문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최고 1천500만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서류 작업을 해야하는 부담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지난달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에서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과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화평법) 대한 완화계획을 밝힌 바 있다.
구체적으로 화관법상 수출규제 대응물질 취급시설 인허가 및 기존 사업장의 영업허가 변경 신청을 기존 75일에서 30일로 단축하고, 반도체 등 설비 특성을 고려한 별도의 시설관리 기준 적용과 서류제출 부담완화를 위한 장외영향평가와 위해관리계획을 통합하기로 했다.
또 화평법상 신규개발 수출규제 대응물질은 물질정보·시험계획서 제출 시 한시적으로 선제조를 인정해주고, 연구·개발용 수출규제 대응물질은 한시적으로 최소의 정보제출 시 등록면제를 인정하기로 했다. 연간 1톤 미만 수출규제 대응 신규물질은 한시적(2년)으로 시험자료 제출도 생략하기로 했다.
하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한시적인 규제완화가 아닌 법개정을 통한 근본적인 환경규제 완화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화평법은 신규 화학물질만 등록하는 수준으로 완화하는 방식으로 법률간 역할을 재정비하자는 것이다.
곽노성 한양대학교 과학기술정책학과 특임교수는 이에 대해 "화학물질 등록이 법률마다 달라 부처 내에서도 협조가 안된다. 화학물질 안전 법률간 역할을 재정비해 개별 운영이 아닌 패키지 형태로 운영해야한다"며 "유럽은 소관 집행위원회를 산업총국이, 일본은 주무성청이 경제산업성으로 산업부처가 화학물질 평가 관리 법률을 주관한다. 환경부가 (환경규제를) 관장하는 우리 마인드와 달리 유럽과 일본은 (환경규제가) 산업발전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삼성전자의 위기, 부품·소재·장비 국산화에 걸림돌
산업통상자원부는 내년도(2020년도) 예산안을 올해보다 23% 늘어난 9조4천608억원으로 편성하고, 국내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을 위한 관련 예산으로 2조8천618억원을 편성했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해 소재·부품·장비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제고하겠다는 목표로 ▲소재·부품 기술개발 기반 구축 ▲소재·부품 미래 성장 동력 확보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위원회 설치 등에 관련 예산을 투입할 예정이다.
특히, 산업부는 시스템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1천96억원의 예산을 편성하고 ▲시스템 반도체 핵심 IP(지적재산) 개발과 설계지원센터 구축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기술개발 ▲시스템 반도체 핵심 IP 개발(90억원) ▲시스템 반도체설계지원센터 설립에도 나서기로 했다.
문제는 정부의 이 같은 계획에도 세계 최대의 반도체 회사이자 국내 최대 수요기업인 삼성전자가 위기에 처할 경우, 산업 활성화에 한계가 있다는 지점이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올해 메모리 반도체(D램, 낸드플래시) 업황 악화 속에서 미중 무역갈등, 한일 경제전쟁 등의 대외적인 위기를 맞아 투자규모를 줄이는 비상경영을 펼쳐왔고,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은 이로 인한 경영위기를 겪어왔다.
이런 와중에 대법원이 지난달 2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연루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상고심에서 2심 판결을 파기·환송하면서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계는 위기상황에 처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거취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투자계획이 시계제로 상태에 빠진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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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정부가 반도체 백년대계를 세울 비전으로 내놓은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산업 역시 이를 주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역할을 삼성전자가 짊어지고 있는 만큼 상황이 불투명해졌다. 삼성전자는 지난 4월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에서 세계 1위 달성을 목표로 '반도체 비전 2030' 전략을 발표하고, 2030년까지 국내 연구·개발 분야에 73조원(시스템 반도체 연구·개발 인력 양성), 최첨단 생산인프라에 60조원(생산시설 확충)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반도체 장비 업체 한 관계자는 "삼성의 경영 공백과 투자위축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있어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며 "지금 상황은 정부가 이야기하는 국산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느냐가 걸린 위기상황"이라고 우려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