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리케이션을 가진 사람이 원하는 맞춤 칩(프로세서) 만드는 세상, 그런 미래를 생각한다. 칩 디자인을 클라우드서비스처럼 쓸 수 있는 개발 플랫폼으로 만드는 게 최종 목표다."
리스크파이브(RISC-V) 오픈소스 프로젝트와 미국 반도체 스타트업 '싸이파이브' 공동설립자 겸 최고기술책임자(CTO) 이윤섭 박사가 최근 지디넷코리아와의 인터뷰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독점 반도체설계자산(IP)에 의존하는 현 생태계보다 더 편리하고 자유로운 기술과 도구를 제공하겠다는 포부다. 쓸 수 있는 프로세서에 맞춰 소프트웨어(SW)를 개발하는 게 아니라, SW 구동에 꼭 맞는 프로세서를 쓰도록 해 주겠다는 메시지다.
리스크파이브는 지난 2010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UC버클리의 이 CTO를 포함한 컴퓨터과학자 세 명이 시작한 오픈소스 하드웨어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는 오픈소스 방식으로 동명의 컴퓨터 프로세서 명령어셋(ISA) 규격을 만들어 왔다. 일반 기업이 이 ISA를 사용해 맞춤형 프로세서를 설계, 생산, 응용하도록 돕는 전문 반도체 스타트업이 지난 2015년 미국 산마테오에 설립된 싸이파이브(SiFive)다.
리스크파이브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리스크파이브재단'이 2016년 설립돼 2017년 회원사 100곳을 넘기고 올상반기 기준 회원사 240곳을 두고 있다. 싸이파이브는 미국, 이스라엘, 인도, 일본, 한국, 중국, 타이완 등 각지에 사무실 12곳, 직원 450여명을 두고 있다. 회사는 지난해 한국지사 설립 이래 상반기 국내 기업과의 라이선싱 및 협력에 이어 하반기 사업 확장도 예고한 상태다.
리스크파이브 프로젝트 참여자의 규모와 싸이파이브의 사업의 급성장 추세는 최근 몇년간 인텔이나 ARM같은 회사의 독점 IP중심 생태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산업계 수요를 방증한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던 이윤섭 CTO도, 관련 사업에 나서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을 모두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인터뷰를 통해 이 CTO에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배경과 사업 현황, 향후 구상을 물었다.
이 CTO와의 문답을 아래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 리스크파이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처음부터 지금처럼 많이 쓰이게 된 코어 아키텍처를 만들자고 거창한 생각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UC버클리에서 컴퓨터아키텍처 전공 대학원생이었던 2010년부터 리스크파이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과거부터 프로세서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뭔가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만들어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2010년부터 앤드류 워터맨이라는 친구와 같이 리스크파이브 ISA를 만들고, 칩을 만들고, 컴파일러와 운영체제 이런 것을 리스크파이브용으로 만들면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 싸이파이브 설립 초기와 현재 상황은
"싸이파이브를 운영한지 3년반 정도 됐다. 2015년 미국에서 창업했고, (사업으로 바빠서) 못할 뻔했던 박사학위 졸업을 2016년 했고 이후 계속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나, 앤드류 워터맨(최고엔지니어), UC버클리에서 지도교수였던 크리스테 아사노빅(최고아키텍트), 세 명이 함께 싸이파이브를 창업했다. 세계 12개 오피스에 직원 450명 정도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점점 일이 많아져, 삼고초려해 조명현 싸이파이브코리아 대표를 모셨다."
- 국내 첫 행사 '기술심포지엄'에서 소개한 코어IP가 사업의 핵심인가
"리스크파이브의 코어 IP를 만드는 게 최종 목표는 아니다. 커스텀 칩 개발 플랫폼을 만드는 게 비전이다. 먼저 내가 생각하는 미래를 말하고 싶다. 지금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쓸 수 있는 칩을 조사해야 한다. 칩을 골라서, 사고, 예제를 보면서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앞으로는 애플리케이션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커스텀 칩을 만드는 세상이 될 것이다. 지금 커스텀 칩을 만들어 쓰려면 밑바닥부터 모든 (기반 기술 요소를) 쌓아올려야 한다. 그런 것을 아마존처럼, 클라우드서비스처럼 API 형태의 개발 플랫폼으로 만들어 보이고 싶다. 칩 디자인을 클라우드서비스처럼 쓸 수 있는 개발 플랫폼으로 만드는 게 최종 목표다."
- 개발 플랫폼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편집자 주: 고객이 싸이파이브에 요구사항을 전달하면, 회사 전문가들이 각 단계별로 대응해 결과물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CPU 요구사항을 주면 코어 디자인을, 플랫폼 규격을 주면 플랫폼 디자인을, 칩 생산 주문을 넣으면 프로토타입 또는 양산형 칩 디자인을 제공한다. 싸이파이브가 적절한 IT인프라를 갖춰 각 단계의 정보를 API 형태로 넘겨받아 처리한다면 실제 클라우드 서비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하게 고려할 게 네 가지다. 하나는 리스크파이브 자체고, 이외에 (커스텀 칩을 원하는 쪽에서) IP와 툴을 살 수 있는 앱스토어같은 마켓플레이스, 템플릿, 클라우드서비스가 필요하다. 여기서 템플릿은 보드서포트패키지(BSP)와 SW개발환경 등을 아우를 수 있는 레퍼런스를 뜻한다. 레퍼런스는 어떤 시장에 맞는 요구사항을 아우를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레퍼런스와 개발환경을 만들어 두면 고객은 그걸로 원하는 커스텀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파는 건 다른 칩 회사와는 다르다. 타사는 기성품을 판다면 우리는 자동차 살 때처럼 기본 모델이 있고 거기에 여러 옵션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거랄까."
- 이미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와 주문형반도체(ASIC)가 있는데…싸이파이브처럼 커스텀 칩을 만들어주는 게, 그렇게 긴요한 일인가
"FPGA는 맞춤화할 수 있지만 현업에 적용하기가 어렵다. ASIC는 현업에 적용할 수 있지만 그러기까지 시간과 리소스가 많이 든다. 싸이파이브는 둘의 장점을 모은 칩 디자인 플랫폼을 만들고 싶은 거다. 이미 칩 디자인 능력이 있는 팀을 보유한 조직이라면 우리의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겐 리스크파이브의 코어 IP를 필요한 부분만 떼어 제공할 수도 있다. 그들이 기존 ARM이나 MIPS(의 IP를 조합해) 사용하는 데 익숙하다면, 그 프로세서의 IP와 동등하게 해드리기도 한다. 우리는 거기에 맞는 SW와 BSP를 제공할 수 있다.
- 다른 칩 아키텍처를 다루던 이들이 쉽게 리스크파이브 기반으로 넘어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 당사자에게 동기부여가 되느냐에 달린 일이다. 칩 디자인 능력을 갖춘 팀을 보유할만큼 큰 회사에서 일하고 있고, 그 팀에서 기존 제품의 코어가 쉽게 사용됐다면…. 많은 사람들이 ARM의 대체재를 찾고 있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6월 중순 '디자인 윈' 100건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디자인 윈은 다른 칩 디자인을 쓰던 조직에서 우리의 코어 IP를 쓰기로 결정한 사례를 의미한다. 산업계 곳곳에서 그런 (대기업 내부 엔지니어 팀에서 그간 써 온 MIPS나 ARM 디자인 기술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시나리오는 꽤 많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다."
- 리스크파이브 기반 칩이 실제 상용화한 제품에 얼마나 쓰이나
"사람들은 더 이상 리스크파이브를 학술연구목적의 기술이라고만 여기지 않는다. 상업용으로 쓰기에 정말 괜찮은지 의심하지 않는다. 굳이 돈을 더 내고 다른 것을 쓰느냐는 정도에 와 있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제품에 들어가고 있지만 공개할 수 있는 건 세 가지 정도다. 중국 샤오미의 웨어러블 사업 독점 협력사인 화미(Huami)의 웨어러블 시계에 우리의 코어가 쓰였다. 한국의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컨트롤러 전문업체 파두(Fadu)에서도 우리의 64비트 임베디드 프로세서를 채택했다. FPGA 제조사 마이크로세미(Microsemi)는 지난해 리스크파이브 서밋에서, 우리의 리눅스용 멀티코어 IP를 갖고 그들의 FPGA 패브릭을 붙인 제품을 내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 대체 기술로서 기존 프로세서 대비 SW와 하드웨어 생태계가 약점이 아닐지
"일단 하드웨어 문제는 전혀 없다. 다만 SW 측면으로는 동적 프로그래밍 언어 지원이 부족하다. 자바스크립트나 자바의 JIT컴파일러같은. 인공지능(AI) 애플리케이션 구현에선 JIT 환경이 가장 문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지금도 느리지만 동작하도록 만들 수는 있는데, 실용적인 개발환경은 아니다. 이걸 보완한다면 생태계 규모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고, 해결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
(편집자 주: 싸이파이브 칩은 쓰레드X, 마이크로COS(μC/OS), 프리RTOS, 제피르OS, RIOT, RTEMS, NuttX, 데비안, 페도라, 실릭스OS(SylixOS) 운영체제를 지원한다. SW개발을 위해 '프리덤 스튜디오'라는 통합개발환경(IDE)을 제공하고, 플래시 프로그래밍용 디버깅 툴 'J링크'를 제공하는 세거(Segger), 임베디드 개발툴 '트레이스32'를 만드는 라우터바흐(Lauterbach), 임베디드워크벤치를 만드는 IAR, 울트라SoC(UltraSoC), 임페라스(Imperas) 등 주요 임베디드 개발툴 업체와 협력하고 있다. 리스크파이브 기기의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을 제공하는 프레임워크 '프리덤 메탈'을 개발해, 이를 사용한 SW가 모든 싸이파이브 칩 디바이스에서 구동되게 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이 이 기술을 쓴지 2~3년밖에 안 됐는데, 관련 SW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상당히 빠른 진전이다. 지금도 싸이파이브는 오픈소스로 제공되는 툴뿐아니라 상업용 임베디드SW 벤더 툴까지 갖추고 있다. 나도 리눅스 개발자라 잘 몰랐는데, 임베디드 개발자들은 자신이 주력하는 플랫폼의 IDE와 디버거를 중시한다. 사용하는 툴을 지원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 않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제품화하기 전부터 에코시스템을 만들어놨다. 주요 임베디드 개발환경은 다 갖춰졌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디자인윈이 더 많아지고 있다."
- 한국에서 어떤 기회를 보고 있고, 하반기 이후 시장을 어떻게 전망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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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베디드 솔루션 시장이 크고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같은 칩 벤더를 통해서도 수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 기술심포지엄에 와서 직접 발표해 준 이들이 있다는 점도, 여기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 (한컴MDS같은) 우리 파트너 회사가 앞으로 리스크파이브를 쓰고자 하는 여러 고객들에게 기술지원을 포함해 훨씬 쓰기 좋게 촉매 역할을 해 줄 것이다. 함께 생태계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하반기 중 사람들의 인식에 이게 상업적으로 쓸 수 있는 기술이란 생각을 더 굳히는 쪽으로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기능 추가보다는 기업 환경에서 사용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보완하는 방향으로 집중하려 한다. 리스크파이브 재단과 싸이파이브 회사, 양 쪽에서 모두 이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 팹리스 회사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들과 함께 일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