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방송의 ‘공영성’에 대한 역할과 책무

속초-고성 화재에 대한 보도채널의 '뒤늦은' 재난방송행태를 보며

전문가 칼럼입력 :2019/04/07 18:29    수정: 2019/04/07 18:30

유진희 필콘미디어 전략기획본부 부장

2019년 4월 4일, 강원도 속초와 고성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처음엔 매년 봄으로 넘어가는 즈음이 되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산불’ 소식인줄 알았다. 물론 산불도 절대 가볍게 넘길 사항은 아니겠으나, ‘희소성’ 차원에서 봤을 때 매우 드문 사건은 아니기에 솔직한 마음으로 산불 소식을 접할 때면 안타까움과 무덤덤한 감정으로 받아 들이곤 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어제의 화재는 단순 산불이 아니었다. 고성의 산에서 발화한 불은 도심지인 속초로 옮겨 붙으며 고성-속초일대를 순식간에 초토화시켰다. 네티즌들이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현장 상황과 인터넷 기사로 공개되는 속초시 사진은 대부분이 도시 전체가 불에 휩싸인 사진들이었다.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화재 범위가 너무 크다 보니, 순간적으로는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대형 화재가 발생했음에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소식을 처음 접한 통로가 최근 사회 이슈가 되고 있는‘버닝썬’ 관련한 기사들의 댓글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두 댓글이면 넘겼겠지만,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들이 심상치않아 다른 기사들을 검색했다. 많지는 않지만 관련기사들이 조금씩 검색되는 걸 보고, 댓글 내용들이 ‘팩트’란 것은 일단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요 포털사이트의 메인 화면(모바일 기준, PC는 확인 안해서 모름)은 관련 뉴스가 게재되지 않았다.

유진희 필콘미디어 전략기획본부 부장

답답한 마음에 오랜만에 거실의 TV를 켜고 보도기능을 갖춘 채널들을 모니터링했다. 그때가 8시40분경이었으니 보도채널은 물론이고, 지상파와 종편은 메인 뉴스가 한창인 때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켠 TV에서 관련 화재소식을 보도하고 있던 채널은 YTN뿐이었다. 다른 채널들에서는 그 흔한 ‘속보자막’도 없이 이념논쟁만 부추길 소지가 있는 정치이야기가 보도되거나, 또는 일상의 소소한 정보를 담은 뉴스들이 다뤄지고 있었다. 속초시민들이라면 안전을 위협받던 그 귀한 시간에 말이다.

황당하게도 이러한 보도행태는 9시 40분경까지 지속되었다. 댓글 기준으로만 봐도 재난이 발생한지 1시간 이상 지났고, 실제 발화시간부터 따진다면 몇 시간을 족히 지났을 시간이었다. 다시 말해, “갑자기 발생해서 미처 방송 준비가 안되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시간이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10시가 넘어서도 지상파 3사에서는 모두 드라마가, 재난방송 주관사인 KBS1채널에서는 <시민의 소리>라는 다큐가 방송되고 있었다. 시민의 소리를 다루면서정작 그 시작 현재 속초시민들의 대피상황은 외면하고 있었다니 씁쓸할 따름이다.(참고로, 10시40분까지도 기존 프로그램이 유유히 방송되고 있었으며, 화재 발생 다음날인 4월5일 9시에도 정확한 ‘발화시점’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보도기능을 갖춘 광의적 의미의)‘방송’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공공성’과 ‘공익성’ 측면에서 방송의 가치는 여전히 공고하게 살아있다. 그 중 ‘재난방송’은 방송의 공공·공익적 역할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강원도 고성-속초 화재는 잠시의 산불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도시가 날아갈 것 같은 엄청난 규모였다. 방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정확한 발화시점은 모르겠지만, 최초 발화 시점은 오후였다는 추정도 있었다. 강풍 때문에 진화도 쉽지 않아 화재 범위가 더 확대될 가능성도 크다는 예상이 나오던 가운데, 피해가 확산되던 밤에 강릉과 충북에서도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야말로 전국이 ‘불바다 공포’에 빠질 상황이었다.

이쯤 되면 보도채널(KBS1은 특히)은 기존방송을 중단하고 ‘재난방송’ 체제로 돌입했어야 했다. ‘국민의 방송’이라며 수신료 인상을 주장하고, ‘공영방송’의 가치와 의의를 주장하던 평소의 모습은 국민들의 뇌리에 생생히 박혀있다.

그로 인해 공영방송으로서의 ‘특권’을 누릴 때 일부 반발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해주던 것이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정서다. 그런데 밤 11시가 다 되어서도 공영방송채널에서 제대로 된 재난방송을 보기가 어려웠다면, 이는 강원도에 지인이나 가족을 둔 사람들은 물론이고, 국민의 알 권리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처사로 밖에 볼 수 없다(그나마 드라마 다 끝난 시점인 11시가 넘어서야 MBC, KBS 순으로 방송하기 시작했다).

그 시각 저질콘텐츠가 많다면서 방송계가 그리도 비판하던 ‘1인 미디어 채널들’은 실시간으로 재난현장을 방송하고 있었다. 주류 미디어 시장이 ‘가짜뉴스’ 소지가 있으니 폐지하자던 ‘포털 댓글란’과 ‘1인미디어’가 활약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방송의 가치는 방송이 스스로 지켜야 한다. 방송도 산업이니 수익을 고민하는 것은 백번 이해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취재하고 내보낼지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의 경우 예능과 드라마 같은 오락 프로그램 편성비율이 높다하더라도, ‘보도기능’을 가진 이상, 여론형성과 국민 알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최우선 책무’이다. <방송=언론>의 공식이 성립하고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이 강조되는 것은 이 때문으로, 이는 '법률상으로도' 규정된 내용이기도 하다.

‘방송(Broadcasting)’의 자부심이 유지되려면 '방송'으로서의 가치와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 필수다. 매번 흔한 이념논쟁과 정치권의 싸움만 전달할 것이 아니라,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재난방송부터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발생한 화재라면 이렇게 했을까. 가뜩이나 국토도 작은데, 이 정도 규모의 화재를 몇 시간이 지나 뒤늦게 방송하는 것은 마치 ‘마지못해’ 방송하는 것 같은 오해마저 불러올 수 있다. 이미 온라인에서는 이번 보도행태를 두고, 네티즌들이 “의도적으로 감췄다”며 각종 음모론을 제기하는 양상이 나타나는 중이다.

방송사의 매우 늦은 보도로 국민들이 무지한 상태일 동안 실제로는 전국 소방차와 소방수들의 집결령이 떨어졌다. 그 역시도 유튜브와 YTN 보도로 알았는데, 그 시간만 해도 밤 9시가 되기 전에였다. 다시 말해 밤 9시 전에 이미 화재의 규모는 ‘재난급’으로 커질만큼 심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 기준으로 10시가 넘어서까지 비교적 늦게, 1시간 이상을 모니터링을 했음에도 방송에서 관련 소식을 접하긴 매우 어려웠다.

4월4일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거실에서 연합뉴스TV를 보시던 필자의 부모님만해도 이 소식을 전혀 모른채 다른 자잘한 뉴스들을 보면서 대화중이셨다. 부친은 잠깐 단신으로 나온 산불소식을 보긴 했다고 하셨으나 그냥 평범한(?) 산불인가 싶었다고 하셨다. 속초-고성 지역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비슷했을 것이다. 관련해서 필자가 SNS계정에 올린 글을 보고서야 알았다는 지인도 있었다(글의 업로드 시간이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기적 마인드’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옛날부터 ‘정’이 많은 민족이라고 알려졌지만, 이제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사상이 세대를 막론하고 다수의 잠재의식 속에 깔려있다.

물론 이것은 개개인의 성품과 교육의 문제도 있겠으나, 이처럼 심각한 재난을 앞에 두고 해당 지역인들을 다같이 걱정할 수 있도록 빠르게 재난방송을 해야하는 공영방송의 직무태만도 한 몫 한다. ‘알권리’가 충족되지 않는데, 시청자들이 어떻게 타인의/혹은 타지역에 미친 위험에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재난방송에 대한 신속보도 매뉴얼은 있는지, 그에 대한 충분한 훈련은 되어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관련기사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고, 방송(언론)은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사항은 즉시 보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발빠른 재난방송은 국가의 재난위기 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효과도 수반한다.

그것이 ‘언론으로서의 감시기능’이 살아있다는 증거고, 그럴 때 방송의 ‘공영성’, ‘공공성’은 방송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알아서 인정해 줄 것이다. 사건 발생 초기부터 현장에서 유독가스 마시면서 취재하고, 한밤에 전문가까지 섭외했던 YTN의 노력이 모처럼 돋보였던 날이다. 적어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재난방송’의 주관사인 KBS는 말할 것도 없고, ‘보도기능’을 갖춘 방송 채널들은 이번 보도행태에 대해 철저한 자기반성과 국민들에게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