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세 청년’ 이웅열과 브이 소사이어티

[이균성 칼럼] 존재론적 자아의 관점

데스크 칼럼입력 :2018/11/29 13:23    수정: 2018/11/29 15:21

#보통사람은 창업주가 아닌 대기업 총수를 보면서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다. 우선 부럽고, 다른 한편으론 과연 그 인생이 행복할까 하는 의문도 드는 것이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의 퇴임사는 그 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퇴임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돼 있다. 이 회장의 인생론 그리고 코오롱그룹의 경영. 어느 쪽이든 한국 대기업 오너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가 코오롱그룹 회장에 취임한 것은 1996년 1월이다. 그의 나이 마흔 때였다. 논어 위정편에 따르면 마흔은 불혹(不惑)이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아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다. 그건 물론 2500년 전의 시대상황이긴 하지만 요즘 세상에도 남자 나이 마흔은 특별하다. 십 수 년의 사회경험을 바탕으로 새 인생에 도전할 마지막 절정기에 해당한다. 이 나이 때 창업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이 회장은 선친 뜻에 따라 회장 자리를 물려받으며 딱 20년만 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회장을 해야 하는 것은 타고난 운명이어서 거스를 수 없지만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공자의 마음을 다는 몰라도 불혹은 아마 운명을 받아들이는 첫 단계다. 지천명(知天命.50세)에 이르러 이에 대한 2차 깨달음이 일어나고 이순(耳順.60세)이 되면 세상과 운명에 도가 터야 한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이 28일 오전 서울 마곡동 코오롱원앤온리타워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퇴임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스1)

#회장으로서 늘 ‘변화와 혁신’을 주창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이 점에서 동양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운명 앞에 존재론적 자아(自我)를 양보키로 한 것이다. 딱 20년만. 그런데 사실은 20년이 아니다. 그 후로도 3년을 더 했고, 회장 취임 전에도 경영 수업 등을 통해 존재론적 자아가 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양보할 만큼 충분히 양보했다고 판단한 게 아닌가 싶다.

#이 회장은 그 양보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금수저(코오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운명)를 꽉 물고 있느라 입을 앙 다물었습니다. 이빨이 다 금이 간듯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랬다. 운명에 내몰려 정치의 소용돌이를 견뎌내느라 이빨이 다 빠졌다. 이 회장의 이런 표현을 배부른 자의 어설픈 엄살로 볼 수도 있겠지만, ‘존재론적 자아의 고독함’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이 회장의 존재론적 자아를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은 뜻밖이다. 그는 퇴임사에서 “새로 창업의 길을 가겠다”고 밝혔다. 코오롱의 대표이사도 이사직도 그만두고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면서 새로운 기업을 하겠다니. 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닷컴 붐이 절정으로 치닫던 2000년에 생긴 ‘브이 소사이어티’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 그였다는 걸 기억하면.

#브이 소사이어티는 이웅열 최태원 신동빈 등 당시 재벌 2~3세와 안철수 이재웅 등 유명 벤처기업가들이 결성한 이너서클이다. 나쁘게 보면 ‘한국의 태자당’으로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좋게 보면 창업 1세대들이 일군 국내 기업 풍토와 경제 구조를 혁신해보자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재벌 2~3세의 경우 ‘무능한 황태자’라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타개책을 놓고 많을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들 상당수에게 황태자는 거부하고 싶은 운명이고 존재론적 자아가 추구하는 바는 ‘성공한 벤처기업가’였던 거다. 그리고 그들이 찾으려는 답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었다. 또 그것을 위해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소사이어티 멤버들 가운데 독립 벤처 기업가들은 부분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재벌 2~3세의 경우 그러지 못했다. 대부분은 ‘황제의 길’이란 운명에 투항하고 말았다.

#모르긴 해도 이 회장은 근자에 생물학적 나이를 고민했을 것 같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무엇인가. 그리고 낡고 빛바랜 수첩을 꺼내들어 거기 깨알처럼 적어놓았던 ‘오래된 미래’를 발견한 것이다. 인간은 그럴 때야 비로소 무엇을 버려야 하는 지 깨닫게 된다. 몸 나이는 63세인 이 회장이 정신 나이 약관(弱冠.20세)이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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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코오롱의 이웅열’ 아니라 ‘이웅열의 000’를 얼마나 보여줄 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또 ‘이웅열의 000’을 위해 코오롱의 뒷배를 어떻게 이용할 지에도 별 흥미가 없다. 자신이 보유한 코오롱 지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자식인 이규호 전무의 역할에 어떤 입김을 행사할 지도 이 글의 소재는 아니다. 다만 인간으로서 존재론적 자아에 대한 깊은 고민을 살짝 엿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게 우리 사회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별적인 존재로 태어나고 그래서 그 지향은 각기 다를 터인데 존재론적 자아를 고민할 틈조차 주지 않고 개별성을 말살하며 군집으로 몰아붙이는 사회. 크고 작은 군집이 종교화하고 필시 군집 사이의 폭력으로 맞서는 사회. 이 회장을 핑계 삼아(뉴스가 되기 때문에) 존재론적 자아의 소중함을 말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