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의 연방대법관 지명을 놓고 미국이 또 다시 시끄럽습니다. 그 동안 대법원에서 진보, 보수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해 왔던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 후임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브렛 캐버노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한 때문입니다.
미국 대법관 지명 때 보수, 진보를 가르는 잣대는 낙태, 동성애, 무기 허용 같은 이슈들이 쟁점입니다. 공화당 쪽에선 낙태와 동성애를 반대하고, 무기소지를 허용할 경우 ‘안전한 보수 후보’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캐버노 대법관 지명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워싱턴D.C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2015년엔 미국 국가안보국(NSA) 사찰이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판결한 이력도 있습니다.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유명해진 그 사건에서 미국 정부 손을 들어줬던 판사입니다.
■ "NSA사찰 정당한 권한 행사…망중립성은 불법" 입장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은 영장 없이 휴대폰 위치 정보를 추적하는 것은 수정헌법 4조 위반이란 판결을 했습니다. 휴대폰 가입은 ’정보 제공에 대한 묵시적 동의’로 볼 수 없다는 판결입니다. 유선 서비스에 적용했던 ‘제3자원칙’을 휴대폰엔 적용할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판결은 5대 4로 박빙 승부였습니다. 물론 캐버노가 케네디 대법관을 대신했더라도 판결이 바뀌진 않았을 겁니다. 당시 케네디 대법관은 영장 없이도 휴대폰 위치 정보를 추적할 수 있다는 쪽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네디 대법관은 비교적 중도 성향을 잘 지켜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보수 4: 진보 4 구도로 돼 있는 연방대법원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지명한 캐버노는 성향이 조금 다릅니다. 케네디보다 훨씬 오른쪽에 가깝습니다. 보수, 진보 지수만 놓고 보면 2016년 작고한 안토닌 스칼리아와 비슷하다고 봐도 크게 무리 없을 정도입니다.
미국은 현재 낙태와 이민자 처리, 의료보험 개혁 등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이런 공방의 최종 심판자 역할을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지명에 미국 정가가 유난히 많은 관심을 보이는 건 이 때문입니다.
IT업계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당장 10월 시작될 새로운 회기에선 애플 앱스토어 반독점 이슈를 비롯한 여러 쟁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더 멀리보면 지금 미국 IT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망중립성 이슈도 연방대법원 탁자 위에 올라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캐버노 지명자는 2018년 망중립성 관련 재판에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망중립성 원칙은 인터넷서비스 사업자(ISP)들의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를 침해했다는 입장입니다. 인터넷 콘텐츠에 대한 ‘편집권(editorial control)’을 제한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 얘길 좀 해볼까요?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던 2015년 아짓 파이 당시 FCC 위원장은 ISP를 유선사업자와 같은 타이틀2로 재분류했습니다. 강력한 커먼캐리어 의무를 부여했지요. 그러자 통신사업자를 중심으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워싱턴D.C 항소법원이 그 사안을 다루게 됐습니다.
항소법원은 2016년 6월 2대 1로 FCC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ISP 재분류를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판결한 겁니다. 그러자 통신사업자들을 중심으로 전원합의체 재심리를 요구했습니다.
전원합의체에서도 6대 3으로 FCC 승소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워싱턴D.C 항소법원에 재직하고 있던 브렛 캐버노 대법관 지명자는 당시 소수 의견을 냈습니다. “망중립성은 ISP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불법적인 규정”이란 게 캐버노 판사의 논리였습니다.
망중립성과 NSA 사찰 같은 첨예한 이슈 때마다 보수 쪽 입장을 대변해 왔던 셈입니다. 브렛 캐버노 대법관 지명에 IT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건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 상원 인준 통과할까…낙태 찬성 공화당 여성 의원 표심 관심
캐버노가 연방대법원 ‘9인의 현자’ 중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선 상원 인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현재 미국 상원은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총 100석 중 51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숫자만 놓고 보면 인준 가능성이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변수도 있습니다. 외신들에 따르면 수전 콜린스, 리사 머카우스키 두 여성 의원은 낙태 지지 입장입니다. 따라서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도 적지 않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제프 블레이크나 존 매케인 의원 역시 이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해 스칼리아 후임으로 닐 고서치를 지명할 때도 보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원래 보수 대법관 자리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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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케네디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대법원 내의 균형추로 꼽히던 법관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노골적인 보수 대법관이 메울 경우엔 상황이 조금 심각해질 우려도 있어 보입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쟁점 사안들이 5대 4 판결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두 명 성향 변화에 따라 미국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판결이 달라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얼핏 보기엔 IT 이슈와 거리가 먼 것 같은 연방대법관 지명에 미국 IT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건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올 하반기 미국 정가를 뒤흔들 연방대법관 인준 문제가 어떻게 마무리될 지 벌써부터 뜨거운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