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립성 원칙 도입을 둘러싼 공방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콘텐츠 사업자와 통신사업자들이 한치 양보 없이 팽팽한 논리 싸움을 펼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요한 변수가 등장했다. 데이터 사용량이 유례없이 증가할 5G 시대 개막이 코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와 함께 통신업계에선 5G를 꽃 피우기 위해선 망중립성 원칙을 완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차세대 네트워크인 5G의 키워드는 ▲초고속 ▲초연결 ▲초저지연이다. 당연히 4G에 비해 네트워크 품질이 급격하게 상승한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통신사들의 망 투자 부담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통신사들은 이런 부분을 앞세워 엄격한 망중립성 원칙을 적용하는 건 5G 시대와 맞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5G 서비스에서 도입될 '네트워크 슬라이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네트워크 슬라이싱'이란 다수의 가상 네트워크로 분리한 뒤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통신업계는 네트워크 슬라이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선 '합리적인 차별'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콘텐츠사업자(CP)들의 생각은 다르다. 국제 평균보다 많은 망 사용료를 내고 있다는 것. 또 콘텐츠 없이 이통사가 네트워크 수익 성장을 이룰 수 있었겠냐면서 망중립성 완화 주장에 맞서고 있다.
■촘촘한 기지국 필요한 5G...이통사, 투자 부담 감당 못해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5G의 기준을 크게 세 가지로 제시했다.
1. 초고속(LTE의 20배)
2. 초연결(LTE의 10배)
3. 초저지연(LTE의 10분의 1)
이 기준을 충족하는 통신망을 구축하기 위해선 종전보다 훨씬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LTE는 700m~1Km마다 기지국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5G용 초고대역인 28GHz에서는 기지국 당 커버리지가 수십미터에 불과하다. 망 구축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트래픽 증가세도 지속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이동통신 데이터 트래픽 통계에 따르면 국내 총 모바일 데이터 트래픽은 지난 2012년 1월 기준 2만3천666테라바이트(TB)였다. 지난 1월에는 25만5천947TB로 약 10.8배 증가했다. 네트워크 업체 시스코는 2021년까지 세계 모바일 데이터 트래픽이 2016년의 5배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통신업계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망중립성 폐지 결정을 '시대 변화를 수용한 정책 변경'이라고 평가하는 건 이런 상황 때문이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망중립성 폐지는 더 이상 네트워크 인프라가 해당 사업자만 관리해야 되는 것이 아닌, IT 생태계 전반이 책임져야 한다는 신호를 준 것과 같다"며 "통신 인프라를 활용, 막대한 이익을 향유하는 OTT 사업자에 대한 공정 경쟁과 사회적 기여 방안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역설했다.
이병태 KAIST IT경영학과 교수는 "FCC가 망중립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바꾼 것은 합리적인 결정"이라며 "인프라만으로는 많은 수익을 내기 힘든 이통사가 5G 시대에서 필요한 수많은 통신장비를 설치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태풍으로 인해 금융 서비스가 마비된 사례를 들며 "통신망이 고도화될수록 서비스가 중단될 경우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한다. 통신비 인하 공약은 계속 나타나는데 투자는 통신사에 일임하면 망 투자를 소홀히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생명과 직결된 서비스에 네트워크 혜택 줘야 합리적"
망투자 못지 않게 5G의 핵심 차별화 포인트인 '네트워크 슬라이싱'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도 합리적 망 차별은 필수적이란 게 통신업계 주장이다.
네트워크 슬라이싱이란 물리적으로 한 개 네트워크를 논리적으로 분리된 여러 개의 가상화된 네트워크로 만든 뒤 다양한 서비스에 특화된 전용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3월 열린 ‘5G 융합시대, 새로운 망중립성 정책방향 토론회’에서 통신업계 전문가들은 이같은 의견을 밝혔다.
네트워크 슬라이싱을 통해 자율주행차, 원격의료 등 생명과 직결되는 서비스의 데이터를 우선 처리하자는 게 합리적 망 차별의 핵심이다. 이 서비스들은 데이터 초저지연이 필수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네트워크 슬라이싱이 도입된 5G 서비스에 합리적 차별을 두자는 것에 대해 토론회 당시 여러 정당 소속 의원들이 공감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IT 업계 한 전문가는 "5G 시대에서 네트워크를 획일적으로 제공하는 것은 도로 수십 개 차선에서 차량들이 같은 속도 제한으로 달리는 꼴"이라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제도를 개선해 다양한 네트워크 서비스 기반으로 여러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CP업계 “망중립성 완화와 5G 구축 비용 분담 엮지 말라”
콘텐츠 사업자(CP)들은 5G 도입에 따른 망중립성 완화 주장에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각 서비스의 트래픽을 공개하지 않고서는 타당한 조치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CP업계 관계자는 " 5G시대의 망 차등 제공에 대한 논의가 타당성을 얻으려면 통신사가 어떤 사업자의 어떤 서비스가 얼만큼의 트래픽을 사용하고 있는지 먼저 공개해야 한다"며 "또 이를 통해 사용자와 사업체로부터 얼만큼의 수익을 얻고 있는지에 대한 현황도 공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털업계 관계자는 “LTE의 경우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쓸 이유가 없었다”며 “통신사는 CP사들의 서비스 덕분에 고가의 요금제를 받으며 어마어마 한 영업이익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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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슬라이싱으로 인한 요금 차등도 납득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영세 스타트업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게 이유다.
인터넷 업계 관계자는 “망중립성이 완화되면 4차 산업혁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스타트업 혁신이 저해될 수 있다”며 “자본력이나 콘텐츠 협상력이 없으면 망 사용료를 비싸게 지불해야 하고, 돈 있는 기업들만 고품질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