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던 미국의 망중립성 원칙이 지난 11일(현지시간) 공식 폐기됐습니다. 인터넷 서비스사업자(ISP)에게 부과됐던 망중립성 원칙이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망중립성 원칙 공식 폐기 1주일 쯤 전에도 흥미로운 뉴스가 하나 들려왔습니다. 연방거래위원회(FTC)와 공방을 벌였던 AT&T가 소송을 계속하지 않겠다고 밝힌 겁니다. 그 덕분에 “FTC가 AT&T 같은 통신사업자의 정보 서비스에 대한 관할권이 있다”는 항소법원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그런데 제 눈엔 망중립성 원칙 폐기 직전에 AT&T가 상고 포기를 한 게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상고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밑그림을 만들어주기 위한 행보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얘기를 중심으로 미국의 망중립성 폐지 얘기를 한번 풀어볼까요?
■ 단대단 원칙과 커먼캐리어가 망중립성의 핵심
일단 망중립성 얘기를 먼저 해봅시다. 망중립성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건 2003년 경이었습니다. 컬럼비아대학 로스쿨 교수로 있는 팀 우가 처음 썼지요. (팀 우는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법학자입니다. 냅스터와 음반회사들의 소송 때 냅스터를 변호한 걸로 유명합니다.)
팀 우 교수가 제시한 망중립성의 핵심 원칙은 ‘단대단(end-to-end)’과 커먼캐리어입니다.
단대단 원칙은 말 그대로 망의 양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차별금지, 차단금지 같은 망중립성의 핵심 원칙은 따지고 보면 ‘단대단 원칙’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더 중요한 건 커먼캐리어입니다. 그런데 커먼캐리어 원칙은 생각보다 역사가 깁니다. 동로마 제국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원칙은 간단합니다.
“마을에 있는 유일한 여관, 항만, 외과의사들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서비스해야 한다.”
이 원칙은 철도 시대엔 철도 사업자들을 규제하는 중요한 근거가 됐습니다. 통신시장에선 백본망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들의 전횡을 막기 위한 원칙으로 원용됐구요.
그렇다면 이번에 미국에서 망중립성 원칙이 폐지됐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ISP들에게 부여됐던 커먼캐리어 의무가 없어지게 됐단 겁니다. ‘단대단원칙’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아짓 파이가 이끄는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인터넷 자유회복’ 문건을 통해 ISP들의 업종 분류를 바꾼 때문입니다. 통신법 706조 타이틀2(유선전화사업자) 영역에 포함돼 있던 ISP들을 타이틀1(정보서비스사업자)로 옮긴 겁니다.
덕분에 ISP들은 ‘커먼캐리어 의무’를 지지 않게 된거죠. 덕분에 차별금지, 차단금지 같은 기본 의무를 면제받게 됐다는 겁니다.
■ 산업 분류 혜택 볼 AT&T, FTC 규제 관련 소송 포기
오바마 시절인 2015년 확립된 망중립성엔 차별금지, 차단금지 외에도 합리적 망관리 의무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변화된 체제에서도 이 의무는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앞에서 전 AT&T가 FTC와의 소송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기로 한 게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고 얘기했습니다. 이게 망중립성과 직접 관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구요?
망중립성이 공식 폐기되던 날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IT 매체 씨넷에 글을 하나 기고합니다. 망중립성 폐지 조치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글입니다.
그 글에서 아짓 파이 위원장은 “걱정할 것 없다”면서 두 가지 근거를 제기합니다.
첫째. 망투명성 의무는 여전히 살아 있다.
둘째. 소비자 보호엔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FTC가 정밀 감시하기 때문에 걱정 없다.
ISP들이 타이틀2에 소속돼 있을 땐 FCC의 직접 관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보서비스 사업자 영역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FCC는 관할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FCC가 정보서비스 사업자를 규제할 경우 ‘월권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송할 경우 곧바로 패소하게 됩니다.
그런데 AT&T가 FTC를 상대로 한 소송이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냐구요? AT&T가 FTC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문제 삼은 게 바로 ‘정보서비스 사업자에 대한 규제 권한’이었기 때문입니다.
2014년 FTC가 제기한 이 소송은 AT&T의 무제한 데이터 서비스를 문제 삼았습니다. AT&T가 무제한 데이터 서비스 가입자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데이터를 사용할 경우 속도를 제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AT&T는 FTC가 통신사업자를 규제할 권한은 없다고 반발합니다. 이에 대해 FTC는 “AT&T는 통신사업자이지만, 쟁점이 된 데이터 서비스는 정보 서비스 영역이다”고 반박합니다. 다시 말해 커먼캐리어 사업자의 정보서비스에 대해선 규제 권한이 있다고 맞선 겁니다.
항소법원에선 AT&T가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항소법원 전원합의체가 재심리한 끝에 FTC의 손을 들어줍니다. FTC가 커먼캐리어 사업자의 정보 서비스는 규제할 수 있다는 판결을 한 겁니다.
그러자 AT&T는 곧바로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펄펄 뛰었습니다. 패소가 확정될 경우 엄청난 비용 부담과 함께 FTC 규제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6월 들어 갑자기 상고 포기 선언을 합니다. 대신 “FTC와 협상해서 문제를 잘 해결하겠다”고 밝힙니다.
■ 사전규제→사후규제로 전환…효과 있을까
만약 AT&T가 계속 소송을 이어갔으면 어떻게 될까요? 11일부터 공식 폐기된 망중립성 원칙 쪽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AT&T 같은 통신사업자들의 인터넷 서비스는 규제 공백 상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FCC는 정보서비스에 대한 직접 규제 권한이 없습니다. FTC는 규제권한은 있지만, 소송 중이라 법적인 지위가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법적 안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AT&T가 FTC의 정보서비스 규제 권한을 인정하고 소송을 중단하기로 한 건 이런 큰 그림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아짓 파이 위원장이 ISP들의 망중립성 원칙이 공식 폐기되던 날 “FTC가 있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건 AT&T의 ‘통 큰 양보(?)’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미국 통신시장의 흐름을 너무 음모론적으로 보는 걸까요? 공교롭게도 망중립성 원칙이 폐지된 직후 AT&T는 타임워너 합병 건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받습니다. 미국 연방법원이 조건 없이 인정하는 판결을 한 때문입니다.
정리해봅시다.
미국 망 사업자들은 2015년 이후 ‘망중립성 원칙’을 바탕으로 한 사전 규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조치로 FTC를 중심으로 한 사후 규제를 받게 됩니다. 반칙행위가 있을 경우 FTC가 조사에 나서는 체제로 바뀐 겁니다.
FTC의 규제 권한을 문제 삼던 AT&T가 쿨하게 포기한 것도 달라진 체제를 수용하는 게 더 유리하기 때문이란 판단에 따른 행동일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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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렇게 달라진 시스템이 시장에서 잘 작동할 수 있을까요? 그게 우리 같은 제3자가 미국 시장의 변화를 바라보는 핵심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망중립성 원칙이 폐지됐는데 우리는 어떻게 될까?”란 질문을 던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 규제 당국 역시 달라진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할지 예의 주시하는 것 외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