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례적인 청원이 올라왔다. 공공기관 문서의 ‘한글(hwp)’ 독점을 금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특정 분야 사업이 민원으로 올라온 것은 이례적이다.
청원을 올린 사람은 정원혁 디플러스 대표. 디플러스는 데이터 분석을 사업 내용으로 하는 스타트업이다. 정 대표를 만나 청원 배경을 들어봤다.☞청원사이트
■"한글(hwp) 사용하지 않는 사람의 볼 권리, 알 권리 차단"
-국민청원을 넣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중소기업 등록을 하러 갔는데 2시간 걸릴 일을 6시간 잡아먹었습니다. 저는 hwp를 쓰지 않는데 대부분의 공공문서는 서류를 hwp로 보내고, hwp로만 받습니다. 공공문서를 pdf 혹은 워드로 제공하는 곳이 있으면 그 부서는 혁신적인 부서라고 봅니다. 거의 대부분은 hwp로밖에 지원을 안 합니다.
공공기관의 일을 처리하려면 제 돈으로 반드시 hwp를 사야만 합니다. 왜 정부가 특정 기업의 소프트웨어를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까. 공공기관 문서를 특정 소프트웨어로만 처리하는 방식은 국민의 알 권리와 볼 권리를 침해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불편함이 있는가
“먼저 대부분 공공기관이 제출해야 할 서류목록을 hwp로 작성해서 올립니다. 그럼 hwp가 깔리지 않은 사람은 제출해야 할 서류목록조차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웹페이지에 작성할 목록을 쭉 나열해서 쓰면 되는데 그걸 내려받는다고 네트워크 트래픽 낭비하고 hwp를 사야만 합니다.
설령 뷰어로 본다 해도 이차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목록들을 hwp로 작성해서 올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html로 작성해서 처리하면 간편한데 hwp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hwp를 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hwp가 아니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항을 굳이 hwp로 작성해서 온 국민이 hwp를 사용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토종 소프트웨어를 살려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글이 토종 소프트웨어라서 정부가 쓴다? 좋습니다. 하지만 공무원들끼리 쓰는 것은 문제없는데 왜 국민한테까지 강요하냐는 겁니다. 왜 제가 제 돈 내고 그 기업을 먹여 살려야 합니까. 저도 한글이 죽어갈 때 ‘한글과 컴퓨터’ 주식 사고, 한글8.15버전도 직접 돈 주고 사서 썼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니 한글과컴퓨터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민들이 그렇게 애국심을 바탕으로 직접 돈 주고 한글 소프트웨어를 사면서 도와줬는데 지금 ‘한글과컴퓨터’가 국민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습니까? 사회 환원하는게 있습니까?”
■"갑질과 면피성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
-이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공무원들이 안일한 게 아닌가 합니다. 개선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공공기관 내 사람들은 이미 기존의 시스템 안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 불편한지도 모를 겁니다. 국민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양식을 제대로 갖춰오는’ 국민만 섬기겠다는 행동입니다. 맞춰 살라는거죠. 한 마디로 갑질인 겁니다.
면피성 문화도 개선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예전의 모든 자료들은 이미 한글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문서표준을 다시 만들려면 비용과 시간이 듭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추진하려 하지 않죠. 괜히 했다가 ‘내 일’이 늘고, 잘못 되면 욕만 먹으니까.”
-면피성 문화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시스템을 도입해서 잘못되면 실패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니까 모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아무 변화도 시도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공무원들이 그냥 그동안 해왔던 것만을 안정적으로 해오다가 자리를 옮겨 가는 것이죠.
‘내가 있을 때만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겁니다. 해봐서 안되면 보완하면 되는데 ‘망했다’, ‘돈만 버렸다’ 이렇게만 생각하다 보니 아무도 무서워서 도전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한국은 갈라파고스섬, 현장 목소리 듣고 경쟁해야"
-어떻게 바뀌길 바라나.
“hwp 안 쓰는 사람도 공적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넷피스24’가 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제대로 호환되지 않고 문서가 깨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또 줄 간격을 비롯해서 문서 내용 등을 수정하는데 시간을 낭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불필요한 문서 작업으로 인해 버리는 시간이 굉장히 많습니다. 세계 표준 html도 있는데, 적어도 길을 2개는 열어 놓으면 좋겠습니다.”
-길을 열면 한국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보는가.
“오히려 더 잘 될거에요. 정부기관에서는 문서작성을 hwp로 해야된다는 게 고정관념이 돼버렸어요. 하지만 다른 프로그램에도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새로운 프로그램을 더 많이 만들 수 있겠죠. KTX도 SRT가 생기니 경쟁이 붙어서 요금도 더 저렴해지고 없었던 전기플러그도 생겼어요.
경쟁을 붙여놓으면 한글과컴퓨터가 한글 소프트웨어를 좀 더 개선할 거에요. 예전에는 한글이 정말 편한 프로그램이었어요. 하지만 독점이 되고 폐쇄적으로 운영되니 이제는 너무 불편해진거죠.”
-한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미 한국은 소프트웨어 후진국가입니다. 한국은 이런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만을 사용하면서 홀로 갈라파고스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거죠.
중국의 소프트웨어 업체 킹소프트는 MS오피스랑 똑같은 오피스군을 만들어 호환성이 아주 좋습니다. 우리나라도 hwp만을 고집하지 않고 길을 열어 놓는다면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더 늘어나고,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도 향상될 겁니다. 기술 개발은 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국산 토종제품을 사달라 하는 것은 너무나 폐쇄적인 운영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독점적 프로그램 사용이 개선될 수 있다고 보는가.
“현장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한글을 잘 다루는 사람이나 회사 개발 전산직원이 테스트 하는 것이 아닌 실제 국민들이 쓰는 걸 봐야 합니다. 중소기업 사장이나 직원을 데려다 실제 업무를 하는 걸 구경이라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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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은 30일 동안 2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추천한 ‘청원’에 한해 정부가 답변을 한다. 정 대표가 올린 ‘한글 독점 반대’ 청원은 현재까지 67명이 참여했으며, 약 25일이 남았다.
정부가 답변하기에는 아직 미미한 참여 숫자다. 하지만 청원 목소리만큼은 단순한 ‘한글 독점 사용’문제를 넘어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과 문화에 대한 뼈있는 충고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