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진 인사이너리(Insignary) 대표는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워드프로세서(한글WP)를 그가 처음으로 상용화했다. 특히 그가 2000년 미국에서 선보인 '씽크프리'는 인터넷을 이용한 사무용 SW로 큰 관심을 모았다. 국산 SW가 컴퓨터 본고장 미국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다.
씽크프리는 한국 SW로는 처음으로 미국 PC월드가 주는 제품상을 받았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이던 스티브 발머가 "리눅스에 이은 제2의 잠재 위협"으로 꼽을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과시했다.
미국 유명 경제지 포천(Fortune)은 강 대표 이야기를 실었고, 그는 미국 유명 방송(ABC)에도 출연했다. 브래들리 존스는 2008년 출간한 '웹 2.0의 영웅들(Web 2.0 Heroes)'에서 트위터 창업자인 비즈 스톤 등과 함께 강태진 대표를 20명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가족을 따라 캐나다로 간 그는 원래 학자가 꿈이었다. 영화를 좋아해 관련 공부를 좀 더 깊이 하고 싶어했다. 영화감독을 꿈꾼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30여년을 피말리는 사업현장에 있었다. 그는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대박은 없었지만 새로운 걸 늘 시도했다. 나라소프트와 씽크프리를 창업했고 한글과컴퓨터, KT, 삼성전자, CJ 등에서 일했다.
현재 맡고 있는 '인사이너리'는 소스코드 없이 바이너리(0과 1로 표현) 코드만으로 보안 및 컴플라이언스(규제준수) 문제를 검증해준다. 2016년 7월 설립됐다. 설립 당시 조시행 전 안랩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국내외 유명 IT전문가들이 다수 참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코엑스 근처에 있는 인사이너리 사무실에서 그의 지난 30년 컴퓨터 역사를 들어봤다.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전 대표가 강 대표가 설립한 회사의 첫 직원이었다는 점과 '씽크프리'가 구글에 인수 될 뻔한 일, KT와 삼성전자에 대한 평가 등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수필집 '내 사랑 내 사업 내 방식대로'(1995년)와 '세상은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1996년)는 공동 집필서를 내기도 했다.
■ 중학교 졸업후 캐나다로...한국서 인턴 근무때 "한글 WP 만들어보자" 결심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만들게 된 배경이나 동기가 궁금하다
▲한글박물관에 가보면 최초의 한글 워드프로세스로 기록돼 있는 '한글프로세스3'이 있다. 애플컴퓨터용 한글 워드프로세서다. 이걸 우리가 만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따라 캐나다로 갔다. 캐나다에서 대학(토론토대)을 마치고 1982년 여름에 한국에 인턴으로 왔다. 한국과학재단이 교포 학생을 인턴으로 초청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석 달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당시 한국도 '애플2 클론'이 많이 팔리고 있었다. 청계천에서 많이 복제했다. 그런데 여기서 돌아가는 한글 SW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한국에 같이 왔던 토론토대 동창과 "우리가 한번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제품은 인턴을 마치고 다시 캐나다로 가서야 완성했다. 대학원 1학기때는 바빠 신경을 못썼고, 2학기 되니 다시 몸이 근질거렸다.
동기들 4명을 다시 모아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1983년 여름에 국내 첫 한글 워드프로세서인 '한글프로세서3'이 탄생했다. 세번째 시도해서 만들어진거라 '3'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한글전용 터미널은 있었지만, 한글 전용 워드프로세서는 우리가 처음이였다. 처음으로 한글 자동모아쓰기를 구현했는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학부 논문도 이걸로 썼다고 하던데
▲ 토론토대학 4학년때 친구들과 함께 토론토에 있는 한국신문사에 간 적이 있다. 전산사식기를 봤는데 당초 기대에 못미쳐 실망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이렇게 밖에 못만드냐"고 했고, 그때 생각한 게 한글자동 모아쓰기 알고리즘이다. 한글 구조가 모음만으로 시작하는 음절이 없다. 소리값이 없는 이응아를 넣어야 한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만들었다. 우리가 착안한게, 컴퓨터가 알아서 음절을 찾아내는 거다. 이론적으로 실험해 입증했고, 이걸 주제로 학부 졸업 논문을 받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보다 2년 먼저 최종문 카이스트 박사가 한글자동모아쓰기에 관한 논문을 썼지만, 이를 PC에서 구현한 건 우리가 처음이다.
=원래 학자가 꿈이었는데 첫 창업은 언제인가
▲토론토대에서 석사 끝내고 박사 준비를 하고 있을때다. 워싱턴DC에 사는 교포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 국방부 전산 사업에 참여하려는데 우리 기술이 필요하다는 거 였다. 이 사업에 참여하려면 회사가 필요하다고했다. 그래서 1983년 휴학하고 만든 회사가 한컴퓨터인스터튜드(한컴퓨터연구소)다. 당시에는 금방 백만장자가 될 줄 알았다(웃음).
금방 비딩 결과가 나온다고 했는데, 한 상원 의원이 방산 비리를 파헤쳐 미국에서 난리가 났다. 결국 프로젝트가 동결됐고 발주가 안됐다. 박사 과정에 들어간 후에 이런 일이 발생해 박사 학위를 못받았다. 당시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아 인지 심리학도 함께 공부했다. 지금 AI 대부라 불리는 제프리 힌트 교수가 내 지도 교수가 될 뻔했다.(웃음)
■실리콘밸리 한국계 거부 필립 황 영향받아…한컴연구소 첫 직원은 이찬진
=필립황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
▲미국 국방부 전산사업이 취소된 후 먹고 살기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몇달 후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한국인인 부자 필립황(황규빈)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가 세운 텔레비디오가 1983년 나스닥에 상장해 그의 재산이 당시 상당했다. 그는 미니 컴퓨터를 저렴한 가격에 미국에 내놔 주목을 받았다.
이 미니컴퓨터를 한국에도 공급했는데, 다른 벤더와 차별화하기 위해 번들링 SW를 만들고자 했고, 이 번들링SW를 나보고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는 굉장히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다. 열정이 대단했다. 대학원 다니면서 본인이 워드프로세서를 만들 생각을 할 정도로 기술도 잘 알았다. 당시 내가 필립과 이야기 하고 있는데 백인 부사장 몇명이 결재를 받으러 왔다가 필립한테 엄청 깨졌다. 이게 너무 멋있었다. 캐나다에 있을때 인종차별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이 우러러 보였고, 사업가가 대단해 보였다. 필립이 "우리회사에 와서 일해"라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나도 박사님같이 되고 싶다. 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필립이 껄껄 웃더라. "좋아 그럼 계약을 하자"고 해 1년간 캐나다에 있으면서 필립을 위해 일을 했다.
내 원래 꿈은 학자였다. 필립을 만나기 전까지만해도 사업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사업을 재미로 하다 돈 벌면 필름 스쿨을 가든가 영화감독을 하든가 할 생각이였다. 영화를 워낙 좋아했다. 그런데 필립을 보면서 사업가가 우러러 보였다.
=한국은 언제 들어왔나
▲인턴에 이어 88올림픽때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장인이 외교관이었다. 한국에 오라고 했다. 온 김에 사업 기회를 찾았고, IBM PC 용 국내 첫 한글 워드프로세스인 '한글 2000'을 몇천 카피 팔았다. 이걸로 회사를 만들었고 그래서 만들어진 회사가 한컴퓨터연구소다. 캐나다에서 설립했고, 89년 이를 들고 한국에 왔다.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대표와의 인연도 묘하다
▲한컴퓨터연구소를 세우고 처음으로 채용한 직원이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대표다. 이 대표가 '한글2000'의 열렬한 사용자 였다. 잡지에 분석 글을 내곤해 알게 됐다. "같이 일하자"고 했더니 좋다고 하더라. 그가 우리 매뉴얼에 오류가 많다고 해 "당신이 수정하라"며 일을 줬다. 그런데 입사 3주쯤에 군대를 가야겠다며, 영장이 나올 것 같다고해, 3주 일한 거 정산해 주고 헤어졌다. 이후 이 대표가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했고, 우리보다 인기가 좋았고, 시장이 아래한글로 굳어졌다.
=후발주자한테 시장을 선점당한 셈인데, 어떻게 대응했나
▲당시 윈도가 뜨면서 워드 사용자가 늘었다. 그래서 윈도 버전을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래한글과 경쟁하던 WP 회사 4곳(한메, 휴먼컴퓨터, 문방사우, 21세기워드프로세스)을 합쳐 나라소프트라고 하는 윈도 용 한글워드프로세스 개발 회사를 94년경 만들었다. '파피루스'라는 윈도 용 WP를 내놨지만 잘 안됐다. 투자자 압력 등이 있어 결국 나라소프트는 1년 정도 유지하다 한글과컴퓨터(한컴)에 인수됐다.
= 한컴에 들어가서는 무슨 일을 했나
▲95년말이다. 한컴에 들어가 그룹웨어 개발 일을 했다. 그러다 97년말 내가 맡고 있던 네트워크 컴퓨터 사업부를 분사, 한컴을 나왔다.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과 썬 창업자 맥닐리가 "네트워크가 컴퓨터"라며 네트워크 컴퓨터 붐을 일으키던 시기다.
나는 새로운 걸 좋아한다. 당시 "이거다"하며 분사했다. 분사해 만든 회사가 제이소프트다. 네트워크 컴퓨터 용으로 업무 SW 만들자고 생각했다. 세계적으로 없던 제품이다. 한컴에서 1년 정도 그룹웨어 개발을 하던 자바 개발팀 20명을 데리고 나왔다. 이찬진 대표가 아쉬워 했지만 한컴이 어렵던 시기라 분사가 이뤄졌다.
=그후 어떻게 됐나. 삼성에서 투자도 받았다던데
▲한컴에서 나와 삼성에서 투자를 받았다. IMF 시절이다. 삼성이 직접 투자하지 못하고 모 투자사를 통해 투자가 이뤄졌다. 삼성이 PDA할 시절인데, MS가 훈민정음 쓴다고 삼성과 계약을 안해주니, 삼성이 자연스레 윈도 경쟁사인 자바와 친해졌고, 자바 기술력이 최고인 우리한테 손을 내밀었다.
■자바 아버지 고슬링이 투자에 도움...미국 VC "미국에 회사 만들어야 투자"
='씽크프리'는 어떻게 해 탄생하게 됐나
▲IMF로 투자 심리가 얼어붙었다. 삼성에서 다시 투자 받는게 어려워졌다. 눈을 실리콘밸리로 돌렸다. 그때는 이미 네트워크 컴퓨터가 사양길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발상을 바꿨다. PC의 브라우저를 네트워크 컴퓨터로 전환, 국내외 창투사한테 2천100만 달러를 투자 받았다.
미국 투자 받을때 자바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고슬링이 도움을 줬다. 고슬링이 한국을 방한, 개발자들과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내가 영어가 되다보니 고슬링 옆에 앉았고,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 투자 받는 걸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미국의 유명 벤처캐피털(VC)을 소개해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국 VC가 투자를 받으려면 회사를 미국에 두라고 했다. 당시만해도 미국 VC들은 자기 회사 반경 50마일 안에 있는 회사한테만 투자했다. 돈만 주는게 아니라 하루에도 12번씩 찾아가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 회사를 만들었고, 이것이 '씽크프리'다.
=론칭 당시 미국에서 화제를 모은 씽크프리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예상을 못한게 브로드밴드다. 미국은 브로드밴드가 너무 느렸다. 씽크프리 데모를 미국 유명 콘퍼런스에서 처음으로 한게 2000년이다. 오피스 SW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걸 세계 처음으로 시연한 거다. 반응이 대단했다. 이런 관심에도 씽크프리가 안된 이유는, 미국은 2003년까지도 브로드밴드가 아니였다.
AOL이 가장 큰 인터넷 회사였는데 전화선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했다. 한국은 99년에 이미 초고속인터넷이 됐다. 2000년에 첫 제품을 내놓을때 미국도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빨랐다.
=그후 씽크프리는 어떻게 됐나
▲결국 한컴이 씽크프리를 인수했다. 나로서는 한컴한테 두번이나 인수당한 셈이다(웃음). 한컴이 인수할때는 다행히 미국 인터넷 환경도 좋아지고, 웹2.0이라는 개념이 생기던 시절이다. 씽크프리가 미국 언론에 회자되면서 미국 ABC 방송의 신기술 특집에도 출연했다. 웹2.0과 씽크프리가 컨셉이 맞았다. '웹2.0의 영웅들'이라는 책이 나왔는데 나도 소개되고, 트위터 창업자도 소개됐다. 2006년에는 미국 PC월드가 주는 제품상을 한국 SW로는 처음으로 받기도 했다.
=그런데 왜 성공을 못했나
▲씽크프리가 잘 나가던 중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젬브라라는 스타트업이 있었는데, 아웃룩을 브라우저로 읽어주는 회사였다. 우리와 제휴한 회사였는데 야후가 이 회사를 인수했다. VC들이 젬브라 보다 우리가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 구글에서 인수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한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우리가 구글과 만난다는 사실이 한국 언론에 먼저 나버렸다. 구글과 만나기 두 시간전에 인수협상 만남이 취소됐다. 이후 구굴은 더 작은 회사를 인수해 구글 닥스를 만들었다. '씽크프리'가 '구글 닥스'가 될 수 있었던 거다.
구글 외에도 야후, SAP, 세일스포스 닷컴 등과도 접촉했다. 세일스포스가 관심을 보여 세일스포스 CEO를 몇번 만나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에서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씽크프리 매각을 반대하는 새 CEO가 한컴에 왔다. 당시 씽크프리가 한컴 주가를 떠받치고 있어, 매각 보다 현상 유지를 원했다. 매각이 안된다고 판단해 2007년에 한컴을 나왔다.
= KT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씽크프리를 나오니 SNS 등 재미있는 게 많았다. 여러 회사와 인터뷰했다. 세일스포스에서도 부사장 오퍼를 받았다. 한번 한 건 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6개월을 직업 없이 지내다 안철수 박사를 팔로알토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 안 박사가 "아는 선배가 웹2.0 전문가를 찾는다"며 만나보라고 했다. 그 분이 최두환 현재 포스코ICT 대표다. 최 대표 추천으로 KT에 입사해 신사업 추진 본부장을 맡았다. 나중에 서비스 육성실장으로 바뀌었다.
=KT에서는 어땠나
▲일은 재미 있었다. 그런데 KT의 문제는, 맛보기 하기는 좋은덴, 뭘 하려고 하면 기존 조직들이 견제를 한다. 새로운 걸 하기 힘들다. 내가 맡아 사업을 하고, 뭔가 완성(빌드)을 해야 하는데 KT에선 이게 안됐다.
■삼성서 맞춤형 서비스 '올웨이즈' 못 내놔 아쉬워
=삼성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
▲KT에서 그러고 있던 중 아이폰이 국내에 들어와 난리가 났다. 마침 알고 지내던 삼성 고위 임원이 "아이폰 때문에 난리인데 삼성으로 오라"고 제의를 해 삼성으로 옮겼다. 2010년 3월이다. 이후 삼성에서 5년간 근무했다.
=삼성에서의 생활은
▲삼성은 정말로 힘든 조직이다. 그래도 5년을 버틴 이유는, 삼성이 스케일이 있어, 여기서 뭘 하면, 세계 몇천만명, 또는 몇 억명이 사용하겠다는, 이런거 때문에 버텼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밀크'라고 하는 뮤직 서비스, 삼성이 만든 가장 성공한 콘텐츠 서비스를 만든거다. 오픈한 지 6개월만에 유저가 3천만명이나 됐다. 삼성도 이런 서비스를 만들 수 있구나하는 걸 보여줬다.
=삼성에서 아쉬운 점은 없나
▲'올웨이즈(Always)'라고 하는 프로젝트를 완성 못한 거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프로젝트였다. 3년이나 준비했고, 1년반 정도 개발했다. '구글 나우'와 비슷한 프로젝트다. 폰을 통해 세계 소비자들을 파악할 수 있는 서비스다. 사용자에게 그때 그때 필요한 정보를 쏴주는 거다. 소비자 취향을 고려해 점심때 뭘 먹을지 알려주고, 저녁에 어떤 TV를 볼 지 알려준다. 일년반을 연인원 수백명을 동원해 개발했고, 갤5에 넣기로 하고, 여기에 맞춰 개발하고 있었는데, 2014년초 라스베이가스에서 구글과 팀 미팅을 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졌다.
선다 피차이 현 구글 CEO가 처음으로 삼성과의 미팅에 참석했는데, 그가 올웨이즈 프로젝트에 심하게 반대했다. 여러 이유로 삼성이 구글 요구를 수용, 삼성의 여러 앱을 정리하면서 올웨이즈 프로젝트도 날아갔다.
=삼성의 SW를 평가하면
▲삼성 엔지니어들은 실력있는 사람들이다. 하드웨어는 세계최고인데, 서비스 형태의 SW, 올웨이즈도 포함해, 아직 이런 게 역량이 부족하다. 이건 경험이 부족해서다. 지속적으로 투자를 안하다 보니 경험이 축적이 안된다. 안타깝다.
=CJ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CJ그룹 IT전략 부문에서 13개월 있었다. CJ는 소비자 정보가 많으니, CJ에서도 올웨이즈와 같은 서비스를 하려고 했다. CJ가 오프라인은 잘하는데 온라인이 약한 감이 있다. 그런데 사용자 데이터를 센싱하기 좋은 길목을 갖고 있다. CJ계열사인 대한통운의 데이터를 활용하려 했다. 하루에 200만~300만 택배 배달이 대한통운을 통해 이뤄진다. 이런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면 구글보다 훌륭한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게다가 CJ는 음식 등 라이프스타일 정보도 많다. 그런데 나를 채용한 사람이 다른데로 가면서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현재 대표로 있는 인사이너리는 어떤 회사인가
▲소스코드 없이 바이너리 코드만으로 보안 및 컴플라이언스(규제준수) 문제를 검증해주는 회사다. '클래리티(Clarity)'라는 솔루션으로 이런 일을 한다. 이런 비즈니스는 국내서는 유일한 것 같다. 세계적으로는 몇 곳 있다. 바이너리 독립 툴을 판매하는 시냅시스가 현재 가장 큰 경쟁사다. 우리 직원은 14명이다. 조시행 전 안랩 전무가 CTO를 맡고 있다. 또 나와 CFO 역할하는 장만준 대표가 공동 대표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상주 직원이 한 명 있다. 국내서만 총 40억 원을 투자 받았다. 미국과 유럽에서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시냅시스에 비해 어떤 경쟁력을 갖고 있나
▲가격은 더 낮고,오픈소스 컴포넌트 검출률은 20~30배 더 좋다고 생각한다. 고객사는 안랩,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파나소닉 등이다. 중국 대기업하고 도입을 위한 테스트를 하고 있다. 올해 글로벌 대형 회사 10곳 정도를 고객으로 확보할 계획이다. 국내 금융권에서도 도입을 검토중이다.
=좌우명이 있나
▲삼성에 있을때, 열정낙서 콘서트할도, 호기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다양한 호기심, 남이 이야기 하는대로 믿는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맞는지 왜 그런지, 그러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긴다. 나는 리스크 테이킹형(위험 감수)이다. 어찌보면 무모한 거다. 뭔가를 보면, 남들보다 쉽게 익사이트 된고,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한다.
목표가 돈이였던 적은 한번도 없다. 돈을 엄청나게 벌기위해 하는게 아니라, 재미있어 하는 거다. 하지만 재미만 가지고 하면 쉽게 지치는 것도 사실이다.
=살면서 어려웠던 적은.
▲큰 어려움이 두번 있었디. 이중 한번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 어렸을때부터 학교가는 걸 즐겼다. 재미있으니까.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살을 생각할때는 아침에 일어나 회사 가는게 싫었다. 처음이였다. 투자자들의 전화로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집에 와서 인상 쓰니 와이프도 싫어했다. "이럴 거면 내가 아예 없어지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인생에 처음이였다. 어느 비오는날 고수부지에 갔는데, 비 내리는 거 보고 그냥 돌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죽을 생각을 하면 뭔 들못하냐"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다시 한게 검색엔진이였고, 지금까지 왔다.
=다시 태어나면 어떤일을
▲다시 태어난다면 사업가 보다는 다른 걸 하고 싶다.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걸 하고 싶다. 캐나다에서 대학교다닐때 연극 연출을 한 적이 있다. 관객은 한국사람들이였고 10일간 공연했다. 100~150명 들어가는 소극장이였는데 10일 내내 매진됐다. 하지만 사업은 하다보면 짜릿한 게 있다. 재미만 가지고 하면 흔들리기 쉬운데, 내가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단순 재미가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에, 세상에 뭔가 기여한다고 생각하면 장거리를 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SW강국 코리아에 대해 조언을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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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큰 시장을 보고 가자고 했다. 세계 시장과 세계 유저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인터넷이 발달돼 장소가 중요하지 않게 됐다. 언제나 시장은 세계를 타깃으로 해야 한다. 또 남들이 다 하는것, 이미 트렌드가 된 것, 이런걸 쫒으면 안된다. 그러면 너무 늦다. 너무 앞서가도 안된다. 반발자국만 빨라야 한다.
의도적으로는 못한다. 우연히 했는데 반발자국 이였다, 이러려면 언제나 남들보다 트렌드를 빨리 캐치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기술은 한국만 보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