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피난민 아들이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사람으로 치면 열두번째다. 당선 확정 직후 “자랑스런 대통령이 되겠다”고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은 어릴적 가난한 수재였다.
부산 최고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사법연수원도 차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피난민 집안이었던 가정은 매끼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다. 수줍은 성격 탓에 선생님에게 질문을 제대로 못했지만 의협심은 강했다.
고등학교때 전교 톱수준이었던 문 대통령은 친구가 교사에게 부당하게 얻어 맞은 걸 보고, 그 과목을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첫 해 입시에서 서울대에 낙방한다.
가슴은 늘 따뜻했다. 그의 어머니는 문 대통령의 학창시절에 대해 이렇게 들려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버스종점에서 학교까지 10리는 족히 되는데, 친구가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가니까 가방을 들어준다고 버스종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더라.”
그는 ‘운명’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국가행정과 정치를 알았고, 유언 같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을 들은 후 정치에 본격 뛰어들었다. 41.08%. 그가 얻은 득표율이다. 1342만3784표를 얻었다. 24.03%(785만2846표)를 얻은 2위 홍준표 후보와 557먼938표 차이난다. 그의 일성은 “개혁과 통합 모두를 이루겠다”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걸어온 길을 조명해봤다.
■ 유년과 소년 시절
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음력 1952년 12월) 경상남도 거제군 명진리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을 피해 남으로 자유를 찾아 온 부모님이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었다.
이후 문 대통령 가족은 북한출신 피난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당시 영도는 비탈진 언덕에 판잣집이 들어선 대표적 서민 달동네였다. 집안은 가난했다. 문 대통령 아버지는 호남 이곳저곳을 다니며 장사를 했고, 어머니도 연탄 배달과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당시를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고 밝혔다.
■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수재였다. 부산 최고 명문 경남중에 입학했다. 여기서 문 대통령은 처음으로 빈부 격차를 체험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만 살던 초등학교와 달리 경남중에는 부유층 자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경남중에 이어 그는 수재들만 간다는 경남고에 전체 수석으로 들어갔다.
방황하는 사춘기 시절 그는 독서를 좋아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학교도서관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책을 읽었다. 소설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로 확대됐다.
공부를 잘했지만 문 대통령은 모범생은 아니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웠다. 정학도 몇차례 당했다. 고교시절 이름 때문에 우숫개 소리로 붙여진 ‘문제아’가 실제가 되었다. 하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 대학 및 군 시절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문 대통령은 부모님과 담임 뜻대로 서울대 상대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수재 중 수재였던 그는 서울대에 왜 떨어졌을까. 스토리가 있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때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결근해 옆 반 선생님이 대신 조회를 했다. 전날 결석한친구가 거짓말했다고 오해한 그 선생님은 친구를 심하게 때렸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부당한 폭력이었다.
당시 키가 작아 앞줄에 앉아 있던 문재인은 항의하고 싶었지만 수줍은 성격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날 이후 문 대통령은 그 선생님이 가르치는 과목을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 반에서 1, 2등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만 그 과목은 늘 꼴찌에 가까웠다. 이는 결국 서울대 낙방으로 이어졌고 그는 재수를 했다.
재수 시절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 1등으로 붙어 학원비를 면제받기도 했다. 재수 끝에 1972년 문 대통령은 4년 전액 장학생을 약속한 경희대학교 법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문 대통령이 입학한 1972년은 10월 유신 선포로 민주주의의 억압이 최고조에 달하던 때다.
대학들은 휴교했고, 학생들은 강의실 대신 술집이나 하숙집에 모여 시국을 개탄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정의감 넘치던 대학생 문재인도 1974년 유신반대 학내 시위를 주동하다 구류처분을 받았다. 이어 1975년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이에 항의하는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그는 구속됐고, 석방되자마자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강제징집 당했다.
특전사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 문 대통령은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 사법시험 도전
1978년 2월 31개월 만기 제대한 문 대통령 앞날은 어두웠다. 복학의 길은 막혔고 대학졸업장 없이는 취직도 쉽지 않았다. 이 와중에 문 대통령이 제일 존경한다는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뒤늦게나마 아버지께 잘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던 문 대통령은 사법고시에 도전키로 마음먹는다. 아버지 49재를 마친 다음날 그는 전남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공부에 매달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치열히 공부한 덕분에 1979년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2차는 바로 보지 못했다. 부마항쟁과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신군부의 12?12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980년 학교로 돌아 온 문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와중에 그동안 준비한 2차 사시 공부가 아까워 80년 4월 학내시위 중 사시 2차 시험을 치렀다. 이후 1980년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그는 구속됐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2차 사법시험 합격 소식을 들었다.
■ 사법연수원 시절과 결혼
문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고, 이 무렵 7년간 연애해온 김정숙 씨와 결혼했다. 성악을 전공한 대학 2년 후배인 김정숙 씨와는 법대 축제 때 처음 만났다. 구속과 강제징집, 고시 공부로 이어지는 7년여의 연애 끝에 둘은 결혼했다. 프로포즈를 한 건 문 대통령이 아니라 부인이었다.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와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박병대 대법관, 박정규 민정수석, 조배숙 의원, 박은수, 고승덕 전의원 등이 연수원 동기다. 기라성 같은 연수원 동기들 속에서도 문 대통령 성적은 발군이었고, 차석으로사법연수원을 졸업했다.
■ 변호사 시절
판사를 지망한 문 대통령은 시위전력으로 판사 임용에서 탈락, 변호사가 됐다. 당시 국내 최대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이를 물리치고 고향 부산으로 갔다.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홀로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한 것도이유였다. 귀향한 문 대통령은 변호사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보니 둘은 자연스레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문 대통령은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을 맡았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를 창립하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부산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지냈다.
■ 참여정부 시절
참여정부 시절 문 대통령은 민정수석 두 차례와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당시 그는 청렴을 몸소 실천했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고,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비행기나 기차는 일반석을 이용했다.변호사 시절 꼼꼼함이 몸에 밴 그는 격무에 시달려 청와대 생활 1년간 과로로 10개의 이가 빠지기도 했다. 지금은 임플란트를 한 상태다. 생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고 할 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 정치 입문
참여정부와 임기를 함께 한 문 대통령은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와 다시 보통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노 전 대통령 수사와 서거로 다시 대중과 만난다. 문 대통령이 정치를 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이를 문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제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요, 김대중 대통령님이 돌아가시기 전, 입원 직전에 바깥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김 대통령님이 오랫동안 힘주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평생을 통해 이룩한 민주주의와 민생, 남북관계가 무너지는 걸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진다. 그러니 정권 교체를 꼭 해야 한다. 반드시 정권 교체를 이루라. 나는 늙었으니 당신들, 후배들이 해야 한다. 이렇게 간곡히 말하고 바로 입원하고 돌아가셨으니, 이 말씀이 유언이 된 셈이다. 이 말씀 때문에 제가 정치에 뛰어들었다."
문 대통령은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총선 승리 두 달 후에는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 정치신인이었지만 민주당 경선에서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후 안철수 후보와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 18대 대선에서 야권 단일후보가 됐지만 득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2014년 12월에는 당대표에 출마해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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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대 대통령 출마와 당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뤄진 19대 대선에서 문 대통령은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출마, 41.08%를 얻어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