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속에 감춰져 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열렸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2년 전 통과된 망중립성 원칙을 뒤집기 위한 공식적인 첫 발을 내디뎠다.
뉴욕타임스, 와이어드를 비롯한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은 26일 워싱턴DC에 있는 뉴지엄 박물관 연설을 통해 2015년 제정된 오픈인터넷규칙 중 인터넷 서비스사업자(ISP) 분류를 종전대로 원위치하겠다고 밝혔다.
아짓 파이의 이날 발언은 사실상 오바마 시대 FCC의 최대 역점 사업인 망중립성 원칙을 무력화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 없다.
■ 오바마 정부, 2015년 ISP들에 커먼캐리어 의무 부과
톰 휠러 위원장이 이끌던 FCC는 지난 2015년 유선 뿐 아니라 무선 사업자까지 통신법 706조의 ‘타이틀2’로 재분류하는 강력한 오픈인터넷규칙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종전까지 정보서비스사업자로 분류됐던 유무선 인터넷서비스제공업체(ISP)들은 유선통신사업자와 동일한 ‘커먼캐리어’ 규제를 받게 됐다.
오바마 행정부의 이 같은 규정은 미국 통신 및 케이블사업자들에겐 눈엣 가시나 다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원상복구’를 시도할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었다.
아짓 파이는 이날 “대공황 시대에 벨 전화회사를 세세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던 규정을 붙들고 있을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 주장과 함께 “타이틀2 통신 서비스로 분류됐던 ISP를 타이틀1 정보서비스로 재분류하는 방안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오바마표 망중립성 죽이기’를 위한 공식적인 첫 발을 뗀 셈이다. 이에 따라 2015년에 이어 또 다시 망중립성 원칙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와이어드에 따르면 FCC는 오는 5월18일 공개회의에서 아짓 파이 위원장의 제안에 대한 공식 표결을 할 계획이다.
현재 구성을 감안하면 아짓 파이 위원장의 제안이 FCC 전체 회의를 통과하는 건 큰 문제가 없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으로 FCC는 공화당이 숫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FCC 전체 회의를 통과하게 되면 새로운 규칙공고(NPRM)를 한 뒤 의견을 수립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 행정절차법 때문에 FCC 자의적 기준 변경은 힘들어
아짓 파이가 당긴 활 시위는 계획대로 ‘망중립성 원상복구’란 과녁을 맞출 수 있을까? 미국 언론들은 이 질문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다.
와이어드는 아짓 파이의 시도가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1946년 제정된 ‘행정절차법’(Administrative Procedures Act)을 꼽았다. 이 법은 연방기관이 ‘변덕스러운’ 결정을 하는 걸 막기 위해 마련됐다. 정권에 따라 각종 정책이 오락가락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법인 셈이다.
따라서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유무선 ISP를 타이틀1으로 다시 분류하기 위해선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걸 입증할 필요가 있다. ISP를 타이틀2로 재분류하는 것의 정당성에 대해선 미국 연방법원이 이미 인정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톰 휠러 전임자였던 줄리우스 제나초우가 FCC 위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차별금지, 차단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오픈인터넷규칙을 마련했다가 연방항소법원 판결로 무력화된 적 있다.
당시 연방항소법원은 “FCC가 정보서비스사업자들에게 커먼 캐리어 의무를 강제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면서 “정 하려거든 타이틀2로 재분류하라”고 판결했다. 그게 2014년 1월에 있었던 일이다.
제나초우스키에 이어 FCC 위원장으로 임명된 톰 휠러가 2015년 유무선 ISP를 타이틀2로 전격 재분류한 것은 이런 법원 판결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조치였다. FCC는 지난 해 통신사업자들의 제소로 열린 연방항소법원 재판에서도 승소하면서 ‘타이틀2 재분류’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이런 상황인 만큼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유무선 ISP 재분류’조치를 밀어부치기 위해선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 "2015년과 상황 다르다"고 입증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 와이어드는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둘 중 한 가지를 입증해야만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첫째. 2015년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둘째. 타이틀2에 따른 강력한 규제를 하지 않더라도 망의 중립성은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와이어드가 전했다.
우선 지난 2년 사이에 상황이 확 달라졌다는 걸 입증하려면 FCC의 강력한 망중립성 원칙 때문에 시장이 악화됐다는 걸 제시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통신 관련 기관인 US텔레콤은 광대역 망 투자가 줄었다는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2014년 770억 달러였던 망투자가 2015년엔 760억 달러로 오히려 감소했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주장도 있다. 와이어드에 따르면 에드워드 마키 민주당 의원은 올초 청문회에서 2014년 866억 달러였던 망 투자가 2015년엔 872억 달러로 늘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 주장에 귀를 기울이든 망중립성 원칙 때문에 상황이 확 달라진 것으로 보긴 힘들다는 게 와이어드의 분석이다.
‘타이틀2 규제’ 같은 강력한 조항이 없어도 시장 질서가 잘 유지될 것이란 주장은 또 어떨까? 이미 미국 통신사들은 비트토러트를 비롯한 인터넷 사업자들의 서비스를 제한해 논란이 제기된 이력이 있다.
그 뿐 아니다. 통신, 케이블 사업자 손을 들어줬던 2014년 미국 연방항소법원 판결도 ‘제어장치’ 필요성에 대해선 인정한 적 있다.
당시 연방항소법원은 FCC의 인터넷 같은 정보서비스사업자에 대한 부수적 관할권을 갖고 있다고 판결하면서 “시장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라고 규정했다. 미국 법원은 망 사업자들의 자율에 맡길 경우엔 공정한 경쟁이 유지되기 힘들 수도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물론 톰 휠러 FCC 위원장이 2014년 새로운 망중립성 원칙을 만들 때도 “힘들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았다. 이미 FCC가 한 차례 항소법원에서 패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톰 휠러는 ‘ISP를 타이틀2로 재분류하는’ 회심의 한 수를 들고 나와서 뜻을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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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강력한 망중립성 원칙 붕괴’란 야심을 갖고 있는 아짓 파이는 어떤 수를 들고 나올까?
최근 2년 동안 미국 통신, 인터넷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망중립성 공방의 열기가 또 다시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다. 최소한 2년은 걸릴 이 공방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미국 인터넷 사업의 미래 모습도 결정될 전망이어서 뜨거운 힘겨루기가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