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평소 공언대로 망중립성 원칙을 무력화할 수 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초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들의 ‘소원’을 하나 들어줬다. 웹 서핑 이력을 비롯한 민감한 개인 정보를 사전 동의 없이 판매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인터넷 개인 정보 판매 허용은 트럼프가 시도한 ‘오바마 색깔 지우기’ 첫 작품이다. 하지만 진짜 승부는 아직 남아 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가장 많은 공을 들였던 ‘망중립성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망중립성은 친통신 성향인 공화당과 트럼프 행정부가 ‘혁파 1순위’로 꼽고 있는 규정이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망중립성 반대론자’인 아짓 파이를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이 같은 야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 오바마 정부, 2015년 유무선 ISP 아우르는 초강력 망중립성 도입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의 최근 행보는 심상치 않다. 지난 주 실리콘밸리를 방문해 주요 IT 기업 경영자들과 회동했다.
씨넷을 비롯한 미국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아짓 파이는 지난 주 페이스북, 시스코, 오라클, 인텔을 비롯한 많은 기업 관계자들을 만났다.
아짓 파이는 이 회동과 관련해 “엄격한 망중립성 규칙을 개정할 아이디어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 차례 실패한 끝에 지난 2015년 강력한 망중립성 원칙을 담은 ‘오픈인터넷규칙’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FCC 위원장이던 톰 휠러는 유선 뿐 아니라 무선 ISP까지 통신법 706조의 타이틀2로 재분류했다.
‘커먼 캐리어’ 의무를 지게되는 타이틀2에는 원래 통신사업자만 포함돼 있었다. 결국 망중립성 원칙이 통과되면서 유무선 ISP 모두 통신사업자에 준하는 강력한 규제를 받게 됐다.
AT&T, 버라이즌, 컴캐스트 같은 미국 주요 ISP 입장에선 오바마 행정부의 망중립성 원칙이 눈엣 가시나 다름 없었다. 이들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에 기대를 건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트럼프 행정부라도 하루 아침에 망중립성 원칙을 무력화하긴 힘들다. 공화당이 FCC에서 3대 2로 숫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무효로 할 순 없기 때문이다.
■ 아짓 파이 FCC 위원장, 실리콘밸리 찾아 탐색전
아짓 파이 역시 현지 언론들과 인터뷰에서 “ 온라인 소비자 권리를 보호할 방법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일 뿐이다”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파이는 오바마 시대에 제정된 강력한 ‘타이틀2’ 규정에 반대할 뿐 ‘자유롭고 개방된 인터넷’을 지지해왔다고 주장했다. ‘개방된 인터넷’이란 대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무선 ISP에게 타이틀2 의무를 부과한 망중립성 규정을 개정할 묘안을 찾고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하지만 아짓 파이 FCC 위원장 생각대로 될 지는 미지수다.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MS) 등이 회원사로 있는 인터넷협회는 아짓 파이와 만난 자리에서 “망중립성이 소비자 경험과 경쟁, 그리고 혁신을 보호해준다고 믿고 있다”는 입장을 전달하면서 압박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최근 망중립성 원칙의 미래에 대한 전망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리 망중립성 원칙을 무력화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단 FCC는 형식상으론 독립기구이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강제할 수가 없다. 적어도 이론상으론 그렇다.
망중립성 원칙을 무력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회에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의회 구도상 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하긴 쉽지 않다. 민주당은 오바마 시대 만들어진 망중립성 원칙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결국 현재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방법은 FCC가 2015년 제정된 ‘오픈인터넷 규칙’을 뒤집을 또 다른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
이론적으론 FCC가 새로운 규칙을 통과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5명으로 구성된 FCC 위원 중 공화당 출신이 3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FCC가 새 규칙을 만드는 건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게 되면 규칙공고(NPRM)를 한 뒤 의견을 접수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2015년 오픈인터넷규칙 제정을 앞두고 2014년 여름 의견수렴할 때는 10만 건 가량이 접수됐다.
게다가 대안 없이 이전 규칙을 무력화할 경우엔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할 수도 있다.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실리콘밸리를 찾아가 의견을 청취하는 것도 이런 점을 고려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능하면 원만하게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한 행보인 셈이다.
■ 가장 유력한 수순은 법정 공방?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망중립성을 원천무효로 할 방법은 없는 걸까?
이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2015년 제정된 ‘오픈인터넷규칙’의 운명은 법원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많다고 전망했다. FCC가 새 규칙을 마련하는 것보다는 법정에서 기존 규칙을 무력화하는 게 더 현실적인 방안일 수 있단 얘기다.
물론 이 방법도 수월하진 않을 전망이다. 이미 한 차례 법정 공방에서 패소했기 때문이다.
통신사들은 2015년 FCC가 망중립성 원칙을 공포하자마자 곧바로 워싱턴 D.C에 있는 연방순회항소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통신사업자들은 FCC가 ISP를 타이틀2로 재분류한 것은 의회가 부여한 권한을 벗어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FCC가 오픈인터넷 규칙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도 함께 내놨다.
하지만 항소법원은 지난 해 6월 두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FCC 손을 들어줬다.
망중립성을 무력화하려는 쪽에서 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다. 대법원 상고를 하거나, 항소법원 전원합의체 재심리를 요청하는 것.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상황에서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섣불리 새로운 규칙을 만들려고 시도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고 전망했다. 항소법원이든 대법원이든 법적인 공방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릴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물론 또 다른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이란 무기를 드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슬람 비자 소비자들의 미국 입국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단행했던 것 같은 조치를 취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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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정명령은 이민국 같은 행정부에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이지 FCC 같은 독립기관엔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결국 여러 가지 조건을 감안하면 미국 대법원이 망중립성 무효 판결을 해주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엔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전망이다. 쉽지는 않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