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CNS와 SK 주식회사 C&C는 삼성 SDS와 더불어 국내 SI 업계를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지난 2016년 11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여의도에 있는 LG 쌍둥이 빌딩에서 개발자 문화에 대해, 그리고 분당에 있는 SK에서 리액티브 프로그래밍에 대해 강연을 했다. 이로써 개인적으로 삼성SDS를 포함한 3사와 모두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서 3사의 분위기가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변화에 대한 열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6년 6월 삼성SDS 잠실사옥을 방문했을 때는 실전 아카(AKKA)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아카에 대한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참석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아카가 아니라 SDS 개발자들이 처한 현실을 논하는 Q&A 시간이었다.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는데 모든 발언을 관통하는 정서적 뿌리는 억울함이었다.
삼성 SDS의 개발자는 엘리트 무사를 모아서 만든 정규군과 비슷하다. 무술에 대한 기본적인 자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엄격한 규율을 따르는 태도, 조직에 대한 충성도 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초의 잠재력을 고려하면 현재의 전투력이 높지 않다. 야전에서 피 흘리며 체득한 실전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 개발자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렇게 오랜 시간 회사가 원하는 일, 코딩과 거리가 있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회사가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대의 코딩 실력은 어디에 있는가. 밖에 나가서 진검승부를 해야하는데 그 실력으로 되겠는가. 참석자들의 탄식과 한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삼성SDS 개발자들이 느끼는 서러움을 공감했다.
LG CNS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변화에 대한 열망, 변화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좀더 강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객관적인 잣대가 아니라 주관적인 느낌이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개발자 문화를 논하는 강연에 김영섭 CEO를 비롯한 임원들이 대거 참석한 것을 보고 놀랐고, 참석자들이 던지는 질문이 억울함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으며, 발언의 뉘앙스나 표정이 더 밝았다. 원덕주 CTO를 비롯한 리더는 개발자에게 코딩 실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대신 코딩 중심의 문화를 어떻게 만들지 함께 고민하자고 말했다.
SK C&C에 방문했을 때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회사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판교에 가는 김에 같이 스케줄을 잡은 NHN 엔터테인먼트에서 강연할 때와 차이가 없었다. 젊고, 밝고, 발랄했다는 뜻이다. 기술적인 내용을 강연하다보면 청중이 나의 이야기에 공명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는지, 흥미를 느끼는지 여부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SK에서 강연을 할 때 나는 젊은 개발자들이 눈빛을 빛내며 열심히 따라오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흥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개발자에게 생명과 같은 지적탐욕이 충분히 느껴졌다.
■ 개발자가 꿀벌이 되어 날지 않으면…
대한민국 SI 업계를 대표하는 3사를 방문한 이후, 내 경험으로부터 유의미한 통찰을 끌어내기 위해 생각을 궁글렸다. 여러 회사를 차례로 방문하면서 뚜렷이 느꼈지만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미세한 부분이 있었다.
한참 고민을 하자 생각이 정리되었는데, 그건 ‘조직이 개인을 옥죄는 힘’이었다. 조직이 개인을 옥죄는 힘이 강할수록 개발자라는 꽃이 시들었고, 그 힘이 느슨할수록 밝게 피어났다. 내가 느낀 차이는 그 힘의 차이였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프로젝트라고 해도 개발자는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알바보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의 셰프에 가깝다. 조직의 규칙과 절차보다는 창조적 자율성이 생산성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썼던 '해커의 길'이라는 칼럼에서 했던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바로가기]
“하지만 해커는 꿀벌이다. 개발자를 ‘관리’하는 일은 양봉장에서 벌을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관리자는 멋대로 날아다니는 개발자를 통제할 수 없다. 오히려 어설프게 행동하다가 침에 쏘이는 일을 걱정해야 옳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면 어쨌든 꿀은 생산된다. 관리자의 목적은 꿀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꿀을 얻는 것이다. 관리자가 꿀을 가져가면, 꿀벌은 더 많은 꿀을 만들어낸다. 해커는 꿀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를 즐기고 사랑한다. 어떤 종류의 통제나 절차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은 해커의 본분이 아니다. 해커의 머릿속엔 코드만 들어있다. 그게 해커의 방식이다.”
40년이 넘는 프로그래밍 경험을 가진 프레드 조지(Fred George) 같은 사람은 꿀벌을 넘어서 아예 "개발자 무정부주의(Programmer Anarchy)"를 이야기한다. 한 컨퍼런스에서 그는 .NET과 SQL 서버로 이루어진 낡은 시스템의 핵심부분을 600줄짜리 루비 코드로 짠 경험을 이야기했다. 루비로 짠 코드가 마음에 들지 않은 개발자들은 그것을 다시 300줄짜리 클로저 코드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고도 성에 차지 않은 개발자들은 그 코드에 새로운 통찰과 경험을 녹여 넣어서 200줄짜리로 만들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코드는 원래 요구사항이 원하는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개발자들도 만족했다.
프레드 조지는 이렇게 묻는다. 현장에서 돌고 있는 코드를 세 번에 걸쳐 재작성하는 것을 허락할 매니저가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한 명도 없다. 진짜 개발자에게 매니저가 필요없는 이유다. 개발자에게 매니저는 방해물에 불과하다.
매니저가 방해물이라는 프레드 조지의 무정부주의적 발상은 약간 과장되었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개발자에게 도움이 되는 매니저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LG CNS의 원덕주 CTO와 식사를 하면서 나는 개발자에게 필요한 것은 시험이 아니라 할 일을 스스로 찾고, 공부하고, 디버깅하고, 공유하면서 실전감각을 익힐 프로젝트 혹은 구체적인 일감이라고 말했다. 시험은 통제의 일환이며 개발자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진검승부다. 삼성 SDS와 LG CNS가 진정한 변화를 희망한다면 조직의 어깨에 들어있는 힘을 빼야 한다. 빠져나간 힘은 개발자 개개인의 심장으로 분산되어야 한다. 개발자들이 꿀벌이 되어 하늘을 날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25일 열린 RTFM:나는 프로그래머다 컨퍼런스는 잠실에 있는 삼성 SDS 사옥에서 열렸다. 삼성처럼 자기완결적이고 밖으로 닫힌 조직이 이런 행사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통크게 지원을 해준 것은 고마움을 넘어 감동을 주었다. 행사에 참여한 삼성SDS 개발자들의 적극적이고 활달한 모습은 외부에서 참석한 개발자들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근본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진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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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LG가 변하면 우리나라 개발시장의 판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 변화가 내부 직원을 꿀벌로 만드는데서 그치지 않고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회사의 개발자를 자유롭게 만드는 수준으로 나아가길 기대해본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이며, 나라 전체의 경제를 위해서 꼭 필요한 변화다.
기억하자. 개발자는 꿀벌이다. 그리고 회사라는 조직은 벌을 가두는 인위적인 벌집이 아니라, 꿀벌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하늘이 되어야 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