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빠진 총수 청문회' 고성에 면박주기 구태도 여전

송곳 질문 실종...총수들도 방어적 태도로 일관

디지털경제입력 :2016/12/06 19:09    수정: 2016/12/06 19:09

정기수 기자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똑바로 얘기해 주세요. 아는 게 뭡니까?"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사상 초유로 9개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모은 청문회장에서 우려했던 구태가 되풀이됐다. 과거 청문회가 그래왔듯이 진실 규명보다는 기업인 증인들을 '망신 주기' 위한 자리로 변질되면서 기업들의 경영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기존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항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새로운 팩트를 파고드는 송곳 같은 질의도 실종됐다. 대기업 총수들 역시 특검의 소환 조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염두에 두고 최대한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해 사실상 진실 규명 찾기는 사전에 차단됐다.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등 총 9명의 총수가 출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사진=뉴스1)

이날 특위 의원들은 기업들의 미르·K스포츠재단 기금 출연 대가성 여부와 최순실씨와의 관계를 파헤치는 데 공세를 가했다. 하지만 총수들은 출연금에 대한 대가성에는 한결같이 부인했고, 최순실씨 일가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당초 검찰 조사를 통해 밝힐 수 있는 사안인 만큼, 굳이 총수들을 청문회에 불러낼 필요가 있냐는 우려가 현실화 된 셈이다. 실제 이날 위원들은 검찰 공소장에 적시된 내용 만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등 답답한 모습을 보였다.

간간히 새로운 의혹을 제기하는 의원도 눈에 띄었으나 총수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대가성이 없었다"며 사전에 준비한 답변을 반복하며 예봉을 피해갔다.

이날 장제원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2014년 4월 26일 한화가 한화갤러리아 명의로 8억3천만원을 주고 구입한 말 두필을 정유라에게 증여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처음에는 '네'라고 답했지만, 이내 장 의원이 다시 "자료에는 2014년도에 한화 갤러리아 명의로 말 한 필도 구입하지 않은 걸로 나온다. 말 두필을 모두 정유라가 전용하게 된다"고 지적하자 "잘 모르겠다"고 번복했다.

특히 이날 청문회 질문의 80%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중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재단 출연이 삼성그룹의 안정적인 승계와 이 부회장의 경영권 확보를 위한 대가성이 있다는 이만희 새누리당 의원 지적에 대해 "(삼성은) 단 한 번도 무엇을 바란다든지, 반대급부를 바라면서 출연하거나 지원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또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박 대통령이 도움을 주지 않았느냐는 의혹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과)안가에서 독대할 때는 이미 주주총회가 끝나고 합병이 된 뒤여서 합병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에게 10억원 상당의 말을 지원한 것은 인정했으나, 지원한 경위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여기 나왔고, 앞으로는 절대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철저히 하겠다"고 언급했다.

다만 이날 총수들은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과 관련, "청와대의 요청을 기업 입장에서 거절하기 어려웠다"며 사실상 강제 모금에 따라 지원이 이뤄졌음을 시인했다.

한편 그간의 청문회 풍경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증인을 향한 호통과 면박을 주는 모습이 여전했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머리 굴리지 말라. 아직 50세도 안 되는 분이 어른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조롱하듯 답변하면 안 된다", "돌려막기 재용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 등 인신공격 성의 발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이날 청문회장에는 고령의 증인들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불거지기도 했다. 특히 정몽구 회장은 장시간 청문회가 이어지면서 의원들의 질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등 체력 저하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번 청문회에 출석하는 총수 중 정몽구 회장은 최고령자다. 193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올해 79세며, 내년이면 팔순을 맞는다. 역대 기업총수 증인 가운데 최고령 기록이다. 정몽구 회장은 2009년 초 심장질환으로 직접 심장을 열어 수술하는 개심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이후 매년 정밀 심장 검진을 받고 있으며 고혈압 치료도 병행 중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날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을 통해 "정몽구 회장이 장시간 증언 중 건강상태가 악화돼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면서 "심장병 수술 전력과 고혈압, 고령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성실한 답변을 한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으나 잠시 병원에 들러 건강상황을 점검할 수 있도록 양해해 주길 요청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앞서 이날 오후 속개된 청문회에서도 이 의원이 정몽구 회장, 손경식 회장, 김승연 회장 등에 대해 "건강진단서와 고령과 병력 등으로 오래 있기에 힘들다는 사전의견서를 제출했다며 먼저 질문하고 일찍 귀가시키자"고 건의했지만 합의에 이르진 못했다.

하지만 이날 세 회장에게 던져진 질의는 총 10건도 되지 않았다. 특히 정 회장은 오전에는 정회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질문을 받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날 총수들의 출석이 최순실 게이트의 진상 규명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반응이다.

재계 관계자는 "최순실 게이트의 정경 유착 의혹을 명명백백히 밝혀내는 것은 중요하다"면서도 "참고인 신분에 가까운 총수들의 청문 효율성은 물론, 총수들이 각 기업의 의사결정을 즉각적으로 해야 하는 환경에서 오래 잡아 놓는 시간 만큼, 경제적인 손실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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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사상 초유로 9개 대기업 총수들이 청문회에 출석한 것과 달리 이번 국정농단의 핵심 증인인 최순실 일가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출석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논란도 가중되고 있다.

이날 특위는 긴급 제안을 통해 우 전 수석을 출석시키기 위해 거소확인에 나서기로 했다. 우 전 수석이 장모인 김장자씨 집에 있다는 제보를 받고 동행명령권을 의결, 7일 오후 청문회장에 데려오는 것을 검토키로 했으나 실제 출석이 가능할 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