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에 훈풍이 불고 있다.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좋은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 것은 확실하다. 스타트업에 대한 다양한 지원, 코딩교육에 대한 뜨거운 관심,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에 대한 광범한 인식, 그리고 국내 SI 업계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늘면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에 대한 처우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개발자들 자신의 활동도 폭이 넓어지고 있다. SNS를 중심으로 모임이 생기는 것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공부모임이나 컨퍼런스가 조직된다. 코딩과 관련한 기술을 토론하고 공유하는 공간이 많아지면서 그 안에서 이름을 얻는 스타개발자가 양산되기도 한다. 이름있는 개발자들이다. 나 역시 글을 쓰고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이런 이름의 절반은 (나를 포함하여) 허명(虛名)이다.
허명을 얻은 사람중에는 없는 실력을 포장해서 이름만 얻은 쭉정이 같은 사람이 있다. 이건 사기꾼이다. 본인 스스로 그것을 안다. 이런 쭉정이는 얼마 가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거나 잡음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논할 가치가 없다.
문제는 이름 주인의 의중과 무관하게 다른 사람들이 이름에 의미를 부여해서 이름값을 과하게 증폭시키는 경우다. 이런 일은 대중강연을 하는 사람이나 정치인을 대상으로 자주 일어나는데, 개발자도 예외가 아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의 주인을 탓하기 어렵지만 이것도 허명이다. 허명의 최종적인 책임은 이름의 주인에게 있다.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질만해서 이름을 얻은 개발자도 많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케이크 위에 뿌려진 장식물에 불과하다. 케이크의 몸체는 다양한 현장에서 노동하는 이름없는 개발자로 구성된다. 실력을 따져도 정말 실력있는 사람은 이름없는 개발자 안에 존재할 확률이 높고, 소프트웨어 세상의 혁신과 발전을 실천하는 사람은 대개 이름없는 개발자 그룹에 존재한다. 이름없는 그들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현장에서 인정받는다. 그게 진짜다. 이름있는 개발자는 이름없는 개발자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럼 이름없는 개발자는 누구일까. 그들에겐 몇 가지 특징이 존재한다.
우선 이름없는 개발자는 내성적이다. 너무 내성적이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올라가는 것이 싫고, 회사에서 일하다 다른 사람과 의견충돌을 일으키며 갈등하는 것도 싫다. 심지어 연차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매니저가 되는 것도 싫다. 조용히 모니터를 바라보며 코딩에 열중하는 것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무대에 올라가서 말을 잘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논쟁에서 이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보다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발자의 다수는 내성적이다. 수잔 케인(Susan Cain)이 쓴 '침묵: 말많은 세상에서 내성적인 사람이 가진 힘(Quiet: The Power of Introverts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은 세간의 착각과 달리 내성적인 성격과 침묵이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멋지게 설명한다.
내성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을 부러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마케팅팀이나 세일즈팀이라면 몰라도 코딩세계에서는 일의 90%가 내성적인 사람에 의해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내성적이라고 해서 외향적인 사람보다 의사소통을 못하는게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서 미국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질문에 빨리 대답하지 못하는 학생을 기다려주는 관행이 있다. 내성적인 사람은 말을 내뱉기 전에 생각을 충분히 정리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름없는 개발자의 또 다른 특징은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비전공'이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많다. 비전공자는 전공자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한다. 건강한 열등감이 동기부여를 한다. 학사과정이나 석사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엄청난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노력하면 차이는 좁혀진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는 사람 앞에서는 전공과 비전공의 차이가 무의미해진다. 비전공자라고 해서 모두 노력하는게 아니라는 점이 함정이지만, 문제는 전공여부가 아니라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다.
이름없는 개발자는 다니는 회사도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는 대기업이나 유명한 스타트업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중소기업의 전산실 직원, 영세기업의 만능 개발맨, 지방 관공서의 개발자, 척박한 SI 프로젝트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이런 환경에서 근무하는 개발자의 평균적인 코딩실력은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개발자의 평균보다 낮다. 그렇지만 그런 현장에서 노동하는 개발자 중에도 실전을 통해서 단련된 실력자가 많다. '실전을 통해서 단련된 실력'이 핵심이다.
이름없는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에서 중요한 소프트웨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만들어본 사람은 유명한 회사에서 부속품에 불과한 프로젝트나 스터디그룹, 혹은 책을 통해서 학습하는 사람보다 본질에 더 가깝다. 회사가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한 일을 가지고 무대에 올라가서 할 말은 없다. 책을 많이 읽거나 스터디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한 일을 정확히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를 창조해서 무언가를 가능하게 만든 경험은 그런 세레모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스스로 진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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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는 개발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SNS를 하거나 컨퍼런스에 참여할 시간도 없다. 일하는 곳도 서울이나 판교가 아니라 지방이다. 칼퇴근이나 좋은 연봉은 딴 나라 이야기고, 야근과 박봉 속에서 땀을 흘리며 꿈을 키운다. 이런 사람들. 지극히 내성적이고, 컴퓨터를 전공하지 않았고, 유명하지 않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스터디에 참여하거나 책을 읽을 시간이 없고, 지방에 살며, 야근과 박봉에 시달리는 개발자들.
겸손하고, 수줍어하고, 조금씩 알아가고, 책임감 때문에 밤새워 일하고, 적은 월급 때문에 한숨을 쉬는 사람들. 이론에는 밝지 않지만 스스로 코드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할줄 아는 사람들. 자기가 한 일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해서 표현하지 못하지만, 매일 주어지는 실전 속에서 잔근육을 키워가는 사람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이름없는 개발자들. 그들의 머리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는 어디에도 없지만, 진짜는 그들이다. 허명을 좇는 개발자나 이런 글을 쓰는 내가 아니다. 진짜의 삶이 행복해질 때 모두의 삶이 행복해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