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중심은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다. 어쩌면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해도 괜찮겠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일부 지역, 팔로알토, 산타클라라, 산호세를 아우르는 작은 땅콩 모양의 영역을 묶어서 실리콘밸리라고 부른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IT 회사들이 모여있고, 수많은 스타트업 회사들이 미래의 성공신화를 꿈꾸며 차고를 개조하고 밤을 새운다.
포브스지에 의하면 지난 2015년 4분기에 미국 전역에서 있었던 펀딩 신청(funding Application)의 17.8%가 이 작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플로리다주가 13.3%로 뒤를 이었다. 스타트업 관련 업계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지표의 하나인 펀딩 신청은 2015년 4분기에 1년 전인 2014년 4분기에 비해서 무려 61% 가량 증가했다. 후끈한 분위기다. 그런데 실리콘밸리가 기록한 17.8%는 최고 기록이 아니었다.
가장 많은 펀딩 신청이 일어난 곳은 20%를 기록한 뉴욕이었다. 맨해튼을 중심으로 브룩클린, 퀸즈를 아우르는 뉴욕 일대는 이제 실리콘앨리(Silicon Alley)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혁신과 창조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금융과 패션의 도시로 알려진 뉴욕은 2008년 금융위기의 충격을 벗어난 이후 텔레콤, 바이오, 핀테크, 애드텍 등을 중심으로 하는 수많은 스타트업의 도전과 함께 새로운 활기와 명성을 얻고 있다.
데이터도그(Datadog)나 몽고DB같은 소프트웨어 회사가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고, IBM같은 헤비급 IT 회사도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다. 뉴욕에 있는 왓슨 연구 센터는 차세대 인공지능 기술을 선도하는 중이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거대 소프트웨어 회사는 맨해튼의 중심지역에 본사 못지않은 화려한 건물을 지어놓고 개발자들을 유혹한다.
이미 알려진 회사만이 아니라 꿈과 상상을 비즈니스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회사도 차고 넘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핀테크 회사 중에는 실리콘밸리의 웰스프런트(wealthfront)와 자웅을 겨루는 베터먼트(betterment)도 있고, 광고와 기술을 접목하는 애드테크(adtech) 회사 중에는 앱넥서스(AppNexus)와 같은 성공적인 기업이 있다. 엣시(Etsy)같은 전자상거래 회사도 유명하다. 스파티파이(Spotify)처럼 유럽에서 성공한 스타트업 회사들은 미국에 진출하기 위해 뉴욕에 사무실을 열고 개발자를 모집한다. 소프트웨어가 비즈니스를 돕는 게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비즈니스인 이런 회사들의 도전이 도시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실리콘앨리의 반격이다.
뉴욕에서 개발자 생활을 하면서 알게된 주변 친구들의 상황을 보아도 이런 정황은 뚜렷히 확인된다. 오랫동안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재능이 있는 친구들 다수가 금융회사를 떠났다. 인도에 있는 아웃소싱 회사의 개발자를 '관리'하는 지루한 업무에서 벗어나서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 들어가 코딩에 몰두하는 삶을 시작했다.
코딩에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나 큰 은행에서 재밌게 할 일이 없어서 지루해 하던 친구는 직원 수가 10명도 되지 않는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F# 언어를 이용한 플랫폼 개발로 밤을 새우고 있다. 나 역시 10년이 넘는 월스트리트 경험을 정리하고 지금은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서 개발을 총괄하고 있으며, 다른 많은 친구들도 속속 정체된 금융권을 벗어나서 실리콘앨리의 역동적인 흐름으로 흡수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흥미로운 변화의 중심에는 드블라지오 뉴욕시장이 야심차게 진행한 Digital.NYC 플랫폼이 자리잡고 있다. (www.digital.nyc)
'뉴욕시: 세계에서 스타트업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중심'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Digital.NYC 웹사이트 페이지에 의하면 "디지털 NYC는 뉴욕의 모든 회사, 스타트업, 투자자, 이벤트, 일자리, 강의, 블로그, 비디오, 일할 공간, 인큐베이터, 그리고 뉴욕의 다섯 개 구역(boroughs)에 대한 자료와 조직을 제공하는 뉴욕시의 스타트업과 테크놀로지 환경 전체를 아우르는 공식적인 온라인 허브다. 이것은 빌 드블라지오 시장, 뉴욕시의 경제개발부서, IBM, 거스트(Gust), 그리고 뉴욕에 기반하고 있는 십 수 개의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회사가 함께 만들어낸 공공과 민간의 독특한 협력 사례다."
2014년에 오픈한 디지털 NYC는 지금까지 100만명이 넘는 방문객에게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며 실리콘앨리의 활황을 이끌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테스트를 해보고 싶어서 사이트에 방문해 보았다. 채용정보를 검색하기 위해 검색창에 "Java"를 입력하자 페이스북, 캐피털원, 베터민트, 커먼본드, 앱넥서스 등 양질의 구인정보가 100개 이상 화면에 나타난다. 뉴욕시 소방서(FDNY)에서 자바 개발자를 찾는다는 재미난 정보도 있다.
투자를 원하는 스타트업을 위한 정보도 있고, 투자할 곳을 찾는 투자자를 위한 정보도 있다. 행정적 과시를 위한 보여주기식 웹페이지가 아니라 뉴욕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살아있는 정보가 활기차게 업데이트 되는 느낌이다. 실리콘앨리의 성공이 이 웹사이트 하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 웹사이트가 성공에 기여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런 뉴욕시의 모범적 사례는 활황을 맞이하고 있는 또 다른 도시인 보스턴의 스타트헙(Starthub), 런던의 Tech.London 등에 계승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의 시장이 이런데 관심을 갖고 비슷한 프로젝트를 추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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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이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 청년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느낌이라면, 뉴욕 실리콘앨리의 스타트업은 직장경험이 있는 중견 개발자나 비즈니스맨이 시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차이는 문화적 차이로 연결되어 미국의 양쪽 해안이 서로 다른 스타트업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실리콘밸리가 철저하게 기술을 중심으로 하고, 어린 청년들의 낙관과 호기심이 극도로 자유분방한 문화를 구축하는데 비해서, 뉴욕의 실리콘앨리는 기술과 비즈니스가 균형을 이루고, 성인 특유의 조심성과 경험이 프로페셔널리즘을 강조하는 문화를 구축한다.
각자 장단점이 있다. 실리콘밸리와 실리콘앨리는 이렇게 문화와 배경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혁신과 창조에 목마른 개발자들에게 천국같은 놀이터를 제공하고 자아실현의 장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밸리와 앨리가 모두 미국의 일부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국인의 관점에서 부러움을 느낀다. 우리나라에서는 테헤란로와 판교가 스타트업 회사들을 위한 좋은 장소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