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스포츠용품업체 아디다스가 지난 5월 깜짝 발표를 했다. 내년부터 아시아 생산 시설을 본국인 독일로 옮기겠다는 선언이었다. 1993년 운동화 생산기지를 저임금지역으로 이전한 지 24년 만이다.
아디다스는 독일 내 고용창출을 위해 저임금 장점을 포기하는 것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진 않다. 겉으론 깜짝 선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교한 국가 전략의 일환으로 단행된 것이다.
그 해답은 독일의 4차산업혁명(Industrie 4.0) 아젠다에서 찾을 수 있다. 의사소통 플랫폼을 기반으로 제조업과 스마트 산업의 유기적 결합을 꾀하는 것이 독일 4차산업혁명의 기본 모형이다. 독일은 2011년 ‘Industrie 4.0’이란 화두를 들고 나온지 4년 만인 지난 해 4월 4차산업혁명 참조모형을 공개했다.
그 중엔 로봇과 근로자의 협업을 통한 작업환경 변화란 대목도 눈에 띈다. 이를 통해 일자리와 가격 경쟁력을 동시에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 경우 저임금 지역을 찾아 떠났던 자국 기업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때 맞춰 아디다스가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대목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독일 사례는 전 지구적 화두로 떠오른 4차산업혁명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 지 잘 보여준다.
■ 4차산업혁명, 나라별로 보는 방향이 다르다
올초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이후 4차산업혁명이 핵심 화두로 떠올랐다. 인공지능과 모바일 인터넷, 그리고 사물인터넷 등을 축으로 한 거대한 기술 혁명으로 사회가 격랑 속에 빠질 것이란 우려였다.
이런 우려에 불을 지핀 건 알파고였다. 구글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 최강 이세돌 9단을 꺾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세기의 대국이 실시간 생중계되면서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그 때 이후 상당수 사람들은 ‘4차산업혁명=알파고(인공지능)’이란 강한 인상을 갖게 됐다.
물론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빅데이터는 차세대 유망 기술이다. 당연히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21세기 세계 경제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선 반드시 키워야 할 분야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4차산업혁명을 얘기할 땐 접근방식이 달라야 한다. 인공지능이 제 아무리 대단한 분야라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그 곳에 무게중심을 두는 건 그리 권할만한 일은 아니다.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한국형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게 현실성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 때 많은 관심을 모았던 ‘한국형 OS’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것도 같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왜 그럴까? 4차산업혁명은 세계경제를 강타한 이슈이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자국중심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밖에 없단 의미다.
독일이 인공지능 같은 거대한 아젠다 대신 자국 IT 기업 SAP를 중심으로 한 제조업 혁신 쪽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같은 이치다. 세계 경제의 강자로 다시 부상하기 위해선 어떤 쪽을 집중 육성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 끝에 나온 전략이란 얘기다.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이상훈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은 지난 6월28일 국회 4차산업혁명포럼 강연에서 주요국들의 4차산업혁명 추진전략을 소개했다.
미국의 4차산업혁명 전략은 클라우드 생태계 선점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찍부터 ’인더스트리 4.0’을 추진해 온 독일은 지능 제조생태계 구축 쪽에 힘을 쏟고 있다. 반면 일본은 로봇 기반 인간접점 시장 점령이 최대 과제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로봇에 방점을 찍고 있는 걸까? 국제로봇연맹 보고서 속에 그 해답이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로봇밀도 면에서 세계 최고다. 로봇 밀도란 근로자 1천명 당 로봇 사용 건수를 의미한다.
무슨 얘기인가? 일본 역시 자신들이 강점을 갖고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일본형 4차산업 모형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건 미국이 4차산업혁명의 핵심축을 클라우드 생태계 쪽에 놓고 있는 것도 같은 차원이다.
■ 한국의 강점부터 잘 살펴보자
각국의 4차산업혁명 담론 속엔 잘 할 수 있고, 자국의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야심이 담겨 있다. 우리가 원론에 충실하되 각론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4차산업혁명이 ‘한국형 모델’로 진행돼야 한다는 데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4차산업혁명을 거론하는 건 세계 경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 재건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형 4차산업 모델은 어떻게 만들어내야 할까? 원론 면에선 국회 4차산업혁명포럼이 제시한 6대 전략 과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전통산업과 ICT 융합구도, 신산업/신기술 활성화,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통한 스타트업 육성, 융합형 인재양성, 국가 기초과학 및 R&D 혁신위한 거버넌스 체제 등이다. 이런 원론에 충실하면서 한국만의 각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4차산업혁명 담론이 제 방향을 잡기 위해선 현실에 대한 진단이 선행돼야 한다. 과연 미국이나 독일, 일본을 압도할 한국만의 장점은 뭘까?
이상훈 ETRI 원장은 초단기 브로드밴드 구축을 통한 IT 코리아 성공 경험을 꼽았다. 이 원장은 국회 특별 강연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국민적 디지털 역량,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 그리고 거대 도시국가, 아파트 중심 주거 문화 등은 한국이 4차산업혁명의 최적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설파했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지적이다. 따라서 이런 부분은 한국형 4차산업혁명 모델을 만들 때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 뛰어난 제조 역량+ 풍부한 벤처 생태계도 소중한 자원
물론 독일 사례에서 배울 부분도 적지 않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탄탄한 제조업 생태계를 자랑한다. 삼성, LG 등 대기업을 중심축으로 중소기업들이 촘촘한 생태계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적 의사소통 모델을 통해 이 생태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부분 역시 중요한 추진 과제다.
독일에 SAP가 있다면 한국엔 오랜 업력과 내공을 자랑하는 SI 기업들이 있다. 이들 역시 한국형 4차산업 모델을 만들 때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특유의 벤처 문화 역시 4차산업 혁명 추진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뛰어난 기술력과 탁월한 모험 정신은 한국의 4차 산업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또 다른 자양분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국회포럼의 6대 아젠다에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원론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생태계를 만들 때 중요한 것은 대기업들의 자세다.
강자일 수밖에 없는 그들이 먼저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야 진정한 상생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생태계 구현을 위한 열린 플랫폼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소중한 과제다.
‘한국형’이란 말에서 불길한 함의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근본 없는 따라하기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국형 4차산업혁명’을 주장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처절한 반성과 성찰을 통한 자기 변신의 기틀 위에서 새롭게 출발하자는 것이다.
이런 반성을 할 때 만나게 되는 곳이 소프트웨어산업이다. 한국은 뛰어난 소프트웨어 역량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그릇된 인식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괄하는 거대한 생태계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국형 모델에선 이 부분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산학연을 연결하는 소프트에어 융합클러스터를 통한 경쟁력 강화 역시 향후 집중적으로 논의될 분야다. 다행히 이 부분은 국회 4차산업혁명포럼에서도 중요한 아젠다로 다루고 있다.
■ 다보스를 잊어라, 해답은 한국에서 찾아야
많은 사람들이 구글의 알파고를 보면서 절망했다. 그들의 뛰어난 인공지능 역량을 부러워했다. 구글 뿐 아니라 페이스북 역시 인공지능 분야에서 상당히 앞서가고 있다.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같은 차세대 유망 분야 역시 그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4차산업혁명에 대한 대비를 하기도 전부터 지레 주눅드는 경향도 적지 않다. 또 다시 늦었다는 한탄의 목소리도 여기 저기서 들린다.
물론 우리가 4차산업혁명 아젠다를 선진국들보다 한 발 앞서 주도하진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핵심 역량을 토대로 전 국가적 역량을 결집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다. 근거 없는 낙관론도 경계해야 하지만, 해보기도 전에 패배의식에 젖는 것도 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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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에서 나온 현란한 논의들은 다 잊자. 알파고의 뛰어난 연산능력도 당분간 머리에서 지워버리자. 대신 우리의 인프라를 기반으로 우리만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자. 이 전략만 잘 수립한다면 절대 늦지 않았다.
20년 전 우린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란 구호에 열광했다. 지금 우린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 최고 정보화 역량으로 4차산업혁명 선도하자’고. 여기에다 한국형 모델만 잘 결합한다면 21세기 선도 국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