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하나] 10년 전 기억
10년쯤 지난 일이다. 중학생이 된 딸 아이가 휴대폰을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엔 절대 휴대폰을 사주지 않겠단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딸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대학생 될 때까지 기다려라”란 말론 설득이 힘들어보였다. 그래서 내 딴엔 꾀를 냈다. “휴대폰이 필요한 이유를 10가지만 써보라”고 했다. 그걸 본 뒤 내가 납득할만하면 휴대폰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딸은 낑띵대더니 조금은 짓궂은 아빠의 시험 문제를 풀어 왔다. 그 때 10가지 이유로 어떤 걸 적어왔는지 정확하겐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휴대폰을 사야 할 10가지 이유’ 그 어디에도 ‘통화’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내겐 그게 충격이었다.
[경험 둘] 초연결 시대의 그림자
지난 해 말 부산까지 문상을 갈 일이 있었다. 그 때 평소 ‘단톡방’에서 자주 소통하는 분과 같은 열차를 타게 됐다. 귀찮았던지, 나이 탓인지, 그도 아니면 굳이 다른 칸까지 놀러 갈 정도로 친하지 않았던 건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린 열차가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그냥 다른 칸에 앉아 있었다. 부산 역에 내린 뒤 전화를 하려고 번호를 찾았더니...아뿔싸. 그 분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메신저로 그렇게 자주 소통했음에도, 막상 전화 통화를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우린 각자 다른 경로로 목적지에 도착한 뒤 “초연결사회의 또 다른 모습”이라며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생각 하나] 페이스북의 초연결 야심
지난 주 데이비드 마커스 페이스북 부사장의 신년 메시지가 화제를 몰고 왔다. 2015년 실적과 2016년 각오를 적은 그 글에서 마커스 부사장은 특히 페이스북 메신저 얘기를 많이 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마커스는 메시지 제품 담당 부사장(VP of Messaging Products)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커스 부사장 얘긴 새로울 건 없다. 페이스북 메신저 월간 이용자 수가 8억 명을 넘었다는 얘기. 그리고 메신저가 이젠 단순히 문자를 주고 받는 차원이 아니란 얘기.
하지만 언론들은 ‘전화번호의 소멸(The disappearance of the phone number)’란 화두에 더 주목했다. 전화번호가 필요 없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얘기 자체가 눈을 확 끌기 때문이다.
마커스 부사장 얘기의 핵심은 이렇다. “이젠 전화번호를 몰라도 음성, 화상 통화를 할 수 있게 됐다.” 플립폰이 사라진 것처럼 이젠 구식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사라지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생각 둘] 페이스북이 꿈꾸는 세상
이쯤이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가 무슨 얘길 하는 지 알아챘을 것 같다. 페이스북 얘긴 사실 새로울 게 없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전화의 모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라지고 있었다.
무슨 얘기인가? 예전에 우리를 연결시켜준 건 전화번호였다. 무선전화기에 입력돼 있던 수많은 전화번호들이 내가 사회와 연결돼 있다는 증거자료였다. 하지만 이젠 전화번호는 수 많은 연결점 중 하나에 불과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다른 연결점이 너무나 많아졌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도 모르는 상대와 친밀한 소통을, 실시간으로 지속적으로 하는 것도 더 이상 낯선 경험이 아니다. 마커스 부사장은 페이스북 초연결세상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랑’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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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곧 페이스북이 꿈꾸는 세상이다. 인스턴트 아티클이란 고품격 뉴스 서비스를 하는 것도, 오지에 공짜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초연결 세상의 허브’란 원대한 꿈으로 가기 위한 과정일 따름이다.
그래서 “페이스북이 전화번호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고 받아들이는 건 맞지만 틀린 진술이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초연결세상이란 거대한 ‘꼭지점 댄스’의 허브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번호는 그 과정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무수히 많은 소품 중 하나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