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특허가 무효라고 주장했던 삼성은 왜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했을까?
삼성은 3일(현지 시각) 애플과 공동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지역법원에 제출한 합의서를 통해 특허 침해 배상금 5억4천800만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날 합의서에서 삼성은 “애플이 이번 주말까지 배상금 요청 송장을 보내올 경우 오는 14일까지 5억4천80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두 회사 소송이 시작된 지 약 5년 만에 처음으로 배상금이 오가게 됐다. 이번 소송은 지난 2011년 3월 애플이 삼성을 제소하면서 시작됐다.
■'배상금 지급연기' 대법원 상고허가 받기 힘든 점 감안한듯
그 동안 삼성은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캘리포니아 북부지역법원 판결에 강하게 반발해 왔다. 배상 판결의 원천이 된 애플 특허권 자체가 무효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삼성이 이번 소송에서 5억4천800만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배상 판결을 받은 것은 애플 핀치투줌 특허권(특허번호 915) 침해 혐의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핀치투줌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위아래로 움직이거나 화면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능을 규정한 특허권이다. 하지만 애플 915 특허권은 지난 해 12월 미국 특허청 내 항소기관격인 특허심판원(PTAB) 3인 재판부에서 무효 판결을 받았다.
삼성이 배상금 지급에 대해 그토록 강하게 반발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어차피 무효가 될 게 뻔한 데 왜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삼성은 배상금 지급 연기를 요청하면서 항소법원에 제출한 문건에서 “배상금 중 디자인 특허와 관련된 3억9천900만 달러는 사건이송명령서 발급 대상이며, 나머지 1억1천400만 달러는 무효 공방 중인 핀치투줌 특허권과 관련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강하게 반발해 왔던 삼성이 왜 배상금 지급에 합의했을까?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배상금 지급 연기 문제만으로는 대법원 상고 허가를 받아내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추가 재판을 통해 배상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 애플 고유의 트레이드 드레스 침해 부분은 무혐의
배경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선 삼성이 배상금을 지급을 결정하기까지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12년 10억 달러에 이르는 거액 배상금 폭탄을 맞았던 삼성은 이후 상황을 조금씩 호전시키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열린 항소심에선 배상금을 절반 수준인 5억4천800만 달러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다.
항소법원은 삼성이 애플 트레이드 드레스를 침해했다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트레이드 드레스 관련 부분은 1심이 열렸던 캘리포니아 북부지역법원으로 파기 환송됐다.
삼성은 파기환송심에 앞서 핵심 쟁점인 ‘핀치 투 줌’ 관련 915 특허권이 무효 위기에 처해 있는 점을 감안해 배상금 지급을 연기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루시 고 판사는 삼성의 요청을 기각하면서 배상금을 즉시 지급하라는 일부 확정 판결을 했다.
이 부분에서 삼성은 크게 두 가지 선택을 했다. 배상금 즉시 지급 건에 대해서는 당시 항소를 했다. 하지만 항소법원이 연이어 기각하면서 대법원 상고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상황이 됐다.
문제는 미국 대법원은 상고허가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법원은 새로운 판례를 확립할 필요가 있는 일부 사안에 대해서만 상고를 허가해준다. 배상금 지급 연기 건만으로는 대법원의 상고 허가를 받아내기 쉽지 않은 상황인 셈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다. 삼성과 애플의 항소심 판결 이후 일부 사안이 분리됐다. 삼성의 디자인 특허 침해 부분은 1심 판결이 그대로 수용됐지만 트레이드 드레스 쪽은 기각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레이드 드레스 관련 부분은 1심 재판부로 파기 환송됐다. 반면 디자인 특허 침해 부분은 삼성이 상고 의사를 밝혔다. 삼성은 지난 8월 2심이 열렸던 항소법원에 ‘명령서 발행 연기 신청(Motion to Stay Issuance of Mandate)’을 접수했다.
■ 디자인 특허 부분도 삼성 유리한 분위기
삼성은 항소법원에 제출한 ‘명령서 발행연기 신청’에서 크게 두 가지 주장을 펼쳤다.
우선 지역법원이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디자인 특허권에 대해 설명하고 배심원들에게 평결 범위를 지시해야 하는 데 이 부분이 미흡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부분은 삼성이 두 번째로 제기한 이유다. 디자인 특허 손해 배상 규정에 대한 적절한 해석과 관련된 중요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항소심이 끝난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됐던 문제다.
법원이 삼성의 디자인 특허 침해를 인정하면서 배상금을 부과한 근거는 미국 특허법 289조였다.
"디자인 특허 존속 기간 내에 권리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중간 생략) 그런 디자인 혹은 유사 디자인으로 제조된 물건을 판매한 자는 전체 이윤 상당액을 권리자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다." (미국 특허법 289조)
하지만 이 조항에 대해 삼성 뿐 아니라 구글, 페이스북 등 많은 IT 기업들은 이 부분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TV처럼 수 천 개 부품이 들어가는 제품이 연루된 소송에서 한 두 개 특허 침해를 이유로 전체 이익을 환수하는 건 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글 등은 항소법원에 제출한 ‘법정조언자 의견(friend of the court)’을 통해 “항소법원 판결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황당한 결과로 이어질 뿐 아니라 복잡한 기술과 부품에 매년 수 십 억달러를 투자하는 기업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최근 소프트웨어 특허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디자인 특허 역시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아날로그 시대에 제정된 법을 첨단 IT 기기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여론도 팽배한 상황이다.
■ 애플 둥근 모서리 특허도 무효 공방 중
삼성이 배상금 지급에 합의하면서 “다시 돌려받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주장은 배경은 또 있다. 핀치투줌 특허과 함께 핵심 쟁점이었던 애플의 둥근 모서리 관련 특허권(특허번호 D677) 역시 무효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허청 재심사부는 D677 특허권에 선행 기술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무효 판결을 했다. 물론 이번 판결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애플이 권리 구제 절차를 통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특허청 재심사부가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정밀 조사를 거친 뒤 내린 결론인만큼 다시 뒤집어질 가능성은 많지 않은 편이다. 만약 이대로 항소심 판결이 확정될 경우 삼성이 배상금을 지불하고 난 뒤 ‘둥근 모서리 특허권’이 무효로 최종 확정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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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번에 삼성이 애플에 지급하게 될 배상금은 재판 결과에 따라선 일부 금액이 다시 환불될 가능성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특허 침해 판결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배상금 지급 판결을 미뤄달라고 요청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삼성은 같은 이유에서 배상금을 내겠다고 합의한 것으로 풀이된다. 어차피 돌려받을 가능성이 많은 배상금 문제로 왈가왈부하기보다는 본안 소송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