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던 1449년. 우티남에 살던 존(John)이 자신만의 유리 제조기술을 공개했다.
그 무렵은 골방에서 비밀스럽게 기술을 전수하던 시절. 그만큼 존이 자신의 비법을 공개한 것은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존이 관행을 깨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공개한 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영국 국왕이던 헨리 6세가 기술 공개 대가로 존에게 20년간 독점 사용권을 준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특허제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흔히 특허는 ‘독점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혁신 장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비밀리에 혼자 독점하는 것보단 일정한 권리를 담보로 만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허는 이율배반적인 제도다. 권리를 보장해주면서 동시에 권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권리 보장’과 ‘권리 남용’ 간의 경계선이 흐릿해지기 쉬운 것도 그 때문이다.
■ 지위 불안정한 특허 세 건, 그래도 내려진 금지 판결
여기 5년째 분쟁 중인 두 회사가 있다. 한쪽은 “우리 특허가 무단 도용당했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자 다른 쪽에선 “그게 무슨 특허냐?”며 댓거리한다. 삼성과 애플 얘기다.
사사건건 아웅대던 두 회사의 희비가 또 한 차례 엇갈렸다. 미국 연방항소법원이 삼성 폰에서 애플 특허기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판결을 한 때문이다. 애플은 즉각 환영 메시지를 냈고, 삼성은 즉시 “다시 생각해보라”며 반박했다.
이번 판결에 이슈가 된 건 크게 세 가지. ▲데이터 태핑(647)▲단어 자동완성(172)▲밀어서 잠금 해제(721) 특허다. 항소법원은 삼성 제품의 특허 침해를 막지 않은 건 지역법원의 재량권 남용이라고 판결했다.
물론 항소심 판결은 ‘특허 침해 제품 판매금지’가 핵심은 아니다. 소송 대상 제품에서 무단도용한 애플 특허 기술을 제거하라, 는 게 핵심이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별 문제 없어 보인다. 남의 것을 그냥 가져다 썼으면,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 그게 특허 제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가져다 쓴 기술 자체가 특허권으로 확고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 모두 법적 지위가 불안정한 상태다.
■ 퀵 링크, 또 다른 소송에선 삼성에 유리한 판결
밀어서 잠금 해제 특허는 세계 곳곳에서 무효 판결을 받고 있다. 최근엔 독일 연방대법원이 최종 무효 판결을 했다. 특허 전문 사이트인 포스페이턴츠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밀어서 잠금 해제 특허 무효 판결을 한 판사가 15명이나 된다.
‘퀵 링크’로 통하는 데이터 태핑은 좀 더 심각하다. 이 특허는 특정 데이터를 누르면 관련 앱이나 창을 띄어주는 기술을 규정한 특허다. 스마트폰에서 이메일에 있는 전화번호를 누르면 곧바로 통화 연결이 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 특허도 미국에서 논란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특허의 기본이나 다름 없는 ‘고유성’을 어디까지 인정해 줄 것인지를 놓고 공방 중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애플이 출원한 647 특허권 관련 문건에는 “분석 서버가 애플리케이션에서 데이터를 받은 뒤 유형 분석 단위를 이용해 구조를 탐지한 다음 적합한 행동으로 연결해준다”고 돼 있다. 쉽게 얘기하면, 이메일인지 전화번호인지 구분한 뒤 메일을 보내거나 통화 연결을 자동으로 해 준다는 의미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당연히 독창성을 인정해주는 게 마땅하다. 삼성이 무단 도용한 건 명백한 잘못인 것 같다.
그런데 두 회사는 이 특허를 놓고도 공방 중이다. 애플은 “전화번호나 이메일을 자동으로 연결해주는 행위 자체”의 독창성을 강조한다. 반면 삼성은 “그런 행위를 하도록 만드는 방식 간의 차별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과 애플 간 소송에 참여했던 배심원들은 애플 쪽 손을 들어줬다. ‘자동 연결 행위 자체’를 독창적인 기술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허란 관점에서 보면 이 판결은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애플이 모토로라와 벌인 또 다른 소송에선 다른 판결이 나왔다. 행위 자체 못지 않게 구동 방식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미국 저작권법 분야 권위자인 리처드 포스너 판사 역시 이런 입장을 견지했다. 이 판결대로라면 이메일 주소나 전화번호를 연결해주는 기술이 어디서 구현되는가, 란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럴 경우엔 삼성은 애플 특허를 침해하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 쟁점인 ‘단어 자동 완성’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소송을 제기한 애플조차도 그 기술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 혁신장려와 특허권 보장, 균형 맞추려면?
2대 1 판결에서 소수 의견을 제기한 샤론 프로스트 판사가 “이번 건은 깜도 안되는 사안이다(This is not a close case.)”고 주장한 것은 이런 점 때문이었다.
프로스트 판사는 그 근거로 쟁점 특허 중 하나는 애플이 사용조차 하지 않는 것이고, 나머지 둘은 링크에서 전화를 연결해주거나, 화면 잠금을 해제하는 사소한 기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수 의견은 “(특허 기술 사용금지가 아닌) 다른 판결을 할 경우 특정 기능을 발명한 사람의 특허권을 소멸시키는 처사”라고 판단했다. 1심 재판을 담당한 루시 고가 “재량권을 남용해” 특허 침해를 방치했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어쨌든 애플은 네 번째 시도만에 ‘특허 기술 사용금지’ 판결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애플 입장에선 전략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시장에선 큰 영향이 없지만,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미국 시장을 노리는 다른 안드로이드 업체들을 제어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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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판결은 법적인 안정성 측면에서 적잖은 공방을 몰고 올 전망이다. 소수의견이 지적한 “사용하지 않는 특허 기술 하나와 사소한 특허 기술 둘”에 대해 사용금지란 엄중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소법원의 이번 판결이 혁신 장려와 독점권 보장이란 특허 제도의 이율배반적 가치 중에서 후자 쪽에 너무 기울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긴 힘들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