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원래 디지털 음악 시장 후발 주자였다.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기 훨씬 전에 한국업체들이 MP3 플레이어를 선보였다. 첫 양산 제품은 1998년 새한정보시스템이 내놓은 엠피맨F10이란 게 지금까지 정설이다.
새한정보시스템 이후엔 레인콤이 ‘아이리버’란 브랜드로 한 때 MP3 플레이어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애플이 아이팟을 내놓은 이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아이튠스란 음악 동기화 프로그램을 내놓은 이후엔 MP3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 아이튠스가 음반 시장에 몰고 온 진짜 혁신은 '건별 소비'
당연히 한번쯤 따져볼 문제다. MP3 플레이어 업체들은 왜 디지털 음악 시장에서 퇴출됐을까? 물론 스마트폰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음악감상 전용 기기의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아이튠스와 아이팟으로 연결되는 애플 특유의 음악 생태계였다.
여기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 얘기만으론 부족하다. 여기에 “왜?”란 질문을 한번 덧붙여보자. MP3 플레이어 업체들은 왜 ‘애플의 공세’에 무기력하게 무너졌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난 아이튠스와 아이팟이 이용자들의 소비 행태를 잘 포착한 부분이 컸다고 생각한다. 무슨 얘기인가? 쓸데 없는 끼워팔기 관행에 대한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한번 따져보자. ‘소녀시대’ 음반을 하나 구입했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엄청난 ‘소녀시대 마니아’가 아닌 다음에야 즐겨 듣는 노래는 한 두 곡에 불과하다. 그 한 두 곡을 듣기 위해 몇 만 원 하는 음반을 통째로 사야 한다.
굳이 비유하자면 예전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의 스카우트 관행과 비슷한 방식이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대학들이 고등학교 스타급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동급생들을 몇 명 같이 받겠다고 제안하곤 했다.
자, 이젠 눈을 신문 쪽으로 한번 돌려보자. 신문시장 역시 엄밀히 말하면 끼워팔기 방식이 지배했다. 자전거 끼워주기 관행 얘기가 아니다. 기사 한 두 건을 읽기 위해 신문 하나를 통째로 사야만 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월드컵이나 중요한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면 스포츠 신문 가판이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을 상상해보라. 그럼 뭔가 와 닿는 게 있을 것이다.
■ 네덜란드 뉴스 스타트업 브렌들이 던진 질문
서두가 좀 길었다. 최근 네덜란드의 뉴스 스타트업인 브렌들이 370만 달러 가량의 투자를 받았다. 여기까지만으론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투자한 주체를 듣는 순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독일 대형 미디어그룹인 악셀스프링어가 바로 투자 주체였기 때문이었다. 뉴욕타임스와 악셀스프링어는 370만 달러 투자 대가로 브렌들 지분 23%를 취득했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브렌들의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브렌들은 네덜란드의 전직 언론인들이 ‘저널리즘계의 아이튠스’를 표방하면서 만든 기업이다. 6개월 여 준비 끝에 지난 5월부터 본격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들의 기본 모델은 아이튠스와 정말 비슷하다. 애플이 주요 음반사들로부터 음원을 확보한 뒤 건당 판매 방식을 도입했던 것과 똑 같은 방식이다. 네덜란드 주요 언론사의 모든 기사들을 한 곳에 모은 뒤 개별 기사 별로 판매하고 있다. 일단 구입한 기사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입 비용을 환불해주기도 한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나니 뉴욕타임스와 악셀스프링어라는 내로라하는 미디어기업들이 흔치 않은 투자를 결심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난 브렌들의 뉴스 판매 방식이 저널리즘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혁신의 방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시 혁신 얘기로 돌아가보자. 흔히 혁신에는 파괴적 혁신과 점진적 혁신이 있다고 한다. 점진적 혁신은 기존 시장의 테두리 내에서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 파괴적 혁신은 기존 시장의 문법 자체를 뒤엎는 것을 말한다. 아이튠스가 ‘패키지 판매’가 지배하던 기존 음반 시장의 문법을 파괴한 것이나, 아이폰이 통신회사 중심의 단말기 유통 구조를 뒤엎은 것들이 대표적인 혁신 사례로 꼽힌다.
특히 나는 혁신이란 관점에선 아이폰보다 아이튠스가 더 파괴적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수 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기본 문법 자체를 뒤흔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브렌들의 비즈니스 모델에 귀를 쫑긋 세운 것도 마찬가지였다. 수요자의 욕구와 공급자의 판매 방식 사이에 놓여 있는 벽을 조금씩 허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모델이 좀 더 정착될 경우엔 언론 시장에도 '개인 브랜드' 중심 소비가 좀 더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따져보면 저널리즘 영역에서도 이미 개인 브랜드 중심 소비가 조금씩 자리잡고 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분들은 네이버 같은 포털의 스포츠 섹션을 유심히 살펴보시라. 그 곳엔 이미 기자들에 대한 평판 시스템이 어느 정도 정착돼 있다. 이름값으로 소비되는 기사가 적지 않다는 의미다.난 2000년대 중반 이후 포털이 뉴스 시장을 지배한 것도 일정 부분은 '패키지 소비'를 '개별 기사 소비'로 바꿔놓은 부분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포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언론사가 패키지화한 제품을 해체한 뒤 포털이란 플랫폼에서 개별 소비를 할 수 있게 된 부분이 매력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물론 브렌들의 실험이 어느 정도나 성공할 지는 알 수 없다. 언론시장이 생각처럼 녹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브렌들이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비슷한 모델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많다고 믿는다. 이제 소비자들은 모든 영역에서 건별 소비에 익숙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브렌들에 주목한 것은 그들의 파괴적 혁신 가능성 때문이었다. 뉴스 소비의 기존 문법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유통 뿐 아니라 판매 방식까지 '개별 기사 단위'로 해체될 경우 20세기 저널리즘 시장의 문법은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 디지털 퍼스트 못지 않게 '파괴적 혁신'에도 눈돌려야
자, 글을 맺자. 디지털 퍼스트와 모바일 퍼스트. 당연히 중요하다. 독자들이 그 쪽으로 몰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형만의 디지털 퍼스트, 모바일 퍼스트는 어쩌면 점진적 혁신에 머무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애플에 밀린 노키아가 썼던 것과 비슷한 전략이 될 수도 있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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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널리즘 영역은 좀 더 적극적인 혁신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는 지도 모른다. 그 중 하나가 브렌들이 선보인 것과 같은 ‘건별 구매 방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성공 여부와 상관 없이 소비자들의 시선은 이미 그 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자들이여. 파괴적 혁신 바람이 불기 전에 자기 상품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좀 더 알차게 하자. 더 이상 소속 언론사 브랜드 뒤에서 경쟁의 맞바람을 피할 수 없는 시절이 올 때를 대비하자. 그래야만 아이튠스형 저널리즘이 대세로 떠오르더라도 자존심 구기지 않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