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에게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인위적으로 제거할 수 있을까? 공상과학에 나올법한 얘기가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소식이 나와 흥미롭다.
미국 씨넷은 27일(현지시각) 매사추세츠 맥린(McLean) 병원 연구진이 트라우마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보도는 연구진이 발견한 방법이 지구인으로 위장한 우주인 비밀경찰의 활약을 다룬 영화 '멘인블랙'에 나오는 가상의 기억제거장치 '뉴럴라이저(neuralyzers)'보다 훨씬 간단한 기술이라고 덧붙였다.
맥린 병원에서 심리학자 연구를 보조하는 하버드의과대학의 에드워드 G. 멜로니 부교수는 우리 연구에서 '제논(xenon) 가스'가 불쾌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구에 따르면 제논 가스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고통받는 개인들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멜로니 부교수는 이 내용을 대단히 흥미로운 발견으로 평가한다.
제논 가스는 무색 무취한 불연성 불활성 기체로, 용도가 다양하다. 일단 조명기구 '제논 램프'의 주재료다. 전문 사진사들이 촬영용 광원을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쓰는 고휘도 조명기구 '스트로보'도 일부는 그런 종류다.
스포츠 세계에선 일부 운동선수들이 부정한 기록 향상 방법 가운데 하나로 제논 가스를 흡입하는 경우가 있고, 이밖에 미국 씨넷은 제논 가스가 현재 사람을 마취시키거나 의료용 영상 진단 작업에 쓰인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런 제논 가스를 동원해 실제로 사람의 나쁜 기억을 없애줄 수 있을까?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지 당장 그런 용도로 쓸 수 있다는 게 아니다. 멜로니 부교수의 실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쥐였다.
멜로니 부교수와 그 동료들은 연구에서 우선 특정한 환경적 조건에 공포를 느끼도록 훈련을 받은 실험쥐들을 저농도의 제논 가스에 노출시켰다. 이 쥐들은 이후 동일한 공포 자극을 받는 동시에 제논 가스를 접했다.
멜로니 부교수는 이런 실험을 통해 쥐들이 제논 가스에 한 번만 노출됐을 때 뇌의 기억형성에 개입한다고 알려진 'N-메틸-D-아스파트산염(NMDA) 수용체'가 차단돼, 최대 2주동안 공포를 느끼는 환경에 대한 반응이 지속적으로 확연히 감소하는 현상을 발견했다며 그건 쥐들이 더이상 그런 자극에 대한 두려움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효과가 사람에게도 통할 거라고 가정해 보면 제논 가스를 들이마시게 하는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이로써 PTSD를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쁜 기억을 없애도록 한다는 얘기다.
다만 여기서 핵심은 아무때나 아무렇게나 제논 가스를 들이마시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트라우마가 된 기억을 떠올리는 그 순간에 제논 가스를 흡입해서 그 뇌가 해당 기억을 차단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거라는 점이다.
이를 보도한 미국 씨넷은 제논 가스를 통한 트라우마 치료 전략을 낡은 보관함 속 서류철 정리에 비유했다. 사람들의 기억 공간을 보관함이라 치고 나쁜 기억을 거기 들어 있는 서류 뭉치라 본다면, 제논 가스는 검토할 서류를 꺼낸 직후 보관함을 잠궈서 다시 거기에 되돌려놓지 못하게 하는 담당자 역할이란 설명이다.
마크 J. 카우프만 맥린병원 번역이미징연구실 이사는 제논 가스는 이미 인체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나쁜 기억을 제논 가스로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현성이 매우 높고 따라서 PTSD 치료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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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억을 억제하는 용도로 제논 가스를 인체에 사용한 사례는 이제껏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다만 결국은 이 물질이 환각, 악몽, PTSD로 인한 고통을 줄일 것이란 희망을 걸어볼 만하다는 평가다.
연구 전문은 과학전문지 '플로스원(PLOS ONE)' 온라인 사이트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