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금까지 소프트웨어 조직에는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문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수직적이고 상명하복 식 조직문화를 없애고 평등한 토론에서 오는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개발문화를 만들고 싶어도 넘기 힘든 큰 장애물이 있다. 바로 '직급'을 부르는 호칭이다. 한국은 아주 옛날부터 이름 대신 직급을 부르는 것이 전통이다. 부장님, 과장님이라고 불러야지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아주 무례한 것이고 조직문화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행위다. 호칭은 오래 이어져 온 전통이며 쉽게 바꾸지 못하는 고착된 문화다. 직급을 부르는 호칭은 조직에서 상하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상명하복 문화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차장과 부장은 권위의 수준이 다르고 차장에서 부장으로 진급했는데 이를 모르고 차장이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있고 부르는 사람도 민망해진다. 가끔은 오랜만에 만난 옛날 동료의 직급을 몰라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한 경우도 많다. 이런 수직적인 조직문화에서는 '대리'와 '부장'이 어떻게 똑같은 관계에서 평등하게 토론을 할 수 있겠는가? 호칭은 사람에 대한 인식과 사고를 지배하고 알게 모르게 행동과 말하는 것을 통제한다. 부장의 얘기가 틀렸어도 눈치를 보며 쉽게 지적하기 어렵다. 설령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고 확신해도 위계질서를 무시할 수 없고 괜히 얘기했다가 나중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자연스럽게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괜히 얘기했다가 일만 많아지고 면박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해서 가만히 있게 된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생각이 지배를 하게 된다. 복잡도가 소프트웨어보다 낮은 산업들, 특히 전통적인 굴뚝산업에서는 상명하복과 위계질서가 더 효율적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한 지식산업이라는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상명하복으로는 효율적인 개발을 하기 어렵다.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과 혁신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무엇보다도 평등한 토론 문화가 필수적이다. 전통적으로 직급보다 이름을 부르는 미국이 소프트웨어 강국이 되는데 이런 호칭 문화가 일조를 했다고 생각한다. 신입사원이 사장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토론 문화는 어릴 때부터 훈련이 되어 있다. 물론 모든 회사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사회 전반적인 문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필자는 수평조직 문화를 정착하기 위해서 호칭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꾼 몇몇 우리나라 회사를 알고 있다. A사는 모든 직원이 서로 '영어이름'을 부른다. 서로 존칭은 하지만 극존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말단 사원이 최고 경영자인 사장에게 그냥 '빌(Bill)' 또는 '스티브(steve)' 이렇게 부른다. 문서나 회의록을 작성할 때도 "Bill이 이렇게 말했다"라고 작성을 한다.
수직적인 조직 문화에서 문서에 사장님을 언급할 때 이름을 그냥 쓰기가 몹시 꺼려진다. '사장님'이라고 써야 할지, '홍길동 사장님'이라고 써야 할지 고민이 된다. 이렇게 주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호칭에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많은 기업은 문서나 대화에서 최고 경영자의 호칭을 CM 등 직급의 약자나 이름의 이니셜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는 최고위층 이름은 직접 언급할 수 없다는 금기도 작용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이름에 들어간 한자는 민간에서는 절대로 쓸 수가 없다. 이만큼 우리는 옛날부터 호칭에 민감하다. 직원들끼리 영어 이름을 부르는 A사는 조직문화가 사뭇 다르다. 호칭 자체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평등한 조직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회의나 토론 시간에 위계질서는 없고 자유롭게 발언하며 면박을 주지 않는다. 사장이나 말단 개발자나 똑같은 위치에서 의견을 얘기한다. 제3자가 이 광경을 보고 있으면 누가 사원이고 과장, 부장인지 알 수가 없다. 각자 자신의 전문성과 경험에 기반 하에 자유롭게 의견을 얘기한다. 이런 환경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빠른 의사 결정도 장점이다. 회사가 직급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팀장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하다. 자신이 맡은 일이 있을 뿐이다. 결재도 한 두 단계로 끝난다. 길어야 팀장, 사장, 이렇게 두 단계다. 결재판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결재를 받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많은 경우 구두나 이메일로 승인이 떨어진다. 사전에 시스템이나 이메일로 내용이 충분히 공유가 되어 있어서 최종 결정은 신속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수동적인 직원은 매우 적고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문화가 퍼져나간다. 나의 위에 줄줄이 상사들이 있어서 시키는 일을 잘하고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아니고 자신이 알아서 일해야 하는 분위기가 자리를 잡는다. 성과가 안 좋은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물론 호칭만 바꾼다고 이런 문화가 저절로 정착되는 것은 아니다. 경영진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호칭을 바꾸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영어이름을 사용하는 호칭 문화는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한 강력한 수단 중 하나다. 하지만 호칭만 바꾸고 권위의식이 여전하다면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권위 의식을 타파하고 상명하복 전통을 없애고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다각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호칭문화는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관련기사
- 여자 개발자가 희망이다2014.03.25
- 외주 SW 개발의 비극2014.03.25
- SW를 '을'로 취급하는 하드웨어의 무지2014.03.25
- 한국 SW가 해외에서 힘 못쓰는 이유2014.03.25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