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2005년 입학한 주시타파니 칼라스부오는 핀란드인이다. 아버지는 당시 노키아의 휴대폰 총괄 수석부사장 올리페카 칼라스부오. 노키아 휴대폰이 왜 한국에서 안 팔리는지 파악하라는 임무가 아들에게 주어졌다.
노키아 사내에서도 이 일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 칼라스부오는 사장 취임을 앞둔 실세였고, 한국은 노키아의 영향력이 미미한 시장이었다.
결과론이지만 이 프로젝트는 회사에 거의 도움이 못됐다.
아버지 칼라부스부오는 노키아 사장에 이어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랐으나 삼성전자와 애플 등에 밀려 회사 몰락의 중심에 섰고, 지난 2010년 문책성 인사로 일선을 떠났다.
이제는 마이크로소프트(MS) 인수돼 ‘미국산’인 노키아. 핀란드 국민들의 자부심이었던 이 기업은 IT판 추억-향수의 대명사가 됐다.
지금은 꽤 잊혀진 노키아의 간단 프로필은 이렇다.
세기를 거슬러 올라 1865년 프레드릭 이데스탐이 핀란드 남서부의 소도시 ‘노키아’에 세운 종이공장이 모태다. 당시에는 통신이 아니라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드는 펄프회사였다.
소도시 ‘노키아’는 강을 끼고 있어 목재 운송이 편했다. 이데스탐이 회사를 그 곳에 세우 이유다. 초창기 노키아 로고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소도시 ‘노키아’의 강을 뜻한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노키아는 본격적으로 미국 기업에 맞설 공룡으로 성장한다. 케이블과 임업, 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몸집을 키웠다.
마침내 지난 1987년 ‘모비라 시티맨(Mobira Cityman)’이란 첫 휴대폰을 만들어냈다.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사용해 화제를 모았다.
요즘으로 보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사용해 인기를 모은 블랙베리처럼 화제였던 제품이고, 노키아 박물관 주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는 노키아란 꽃이 가장 활짝 핀 시기다. 휴대폰 제왕 자리에 올랐다. 한국에는 1995년 진출했다가 얼마 안 돼 철수했지만 세계적으로 휴대폰 제왕은 분명 노키아였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8년 미국 모토로라를 제치고 휴대폰 연 판매량 첫 1위를 차지했다. 핀란드 국민들은 환호했다.
‘싼 맛’에 사는 제품이 아니었다. 유럽형 2세대(2G) 이동통신을 처음 개발한 혁신의 브랜드가 노키아였다. 로열티 수입만으로도 돈 방석을 쌓았다.
기술 혁신과 판매 성적 등 모든 분야에서 적수가 없었다.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를 만들어낸 시절도 있었다.
1994년 ‘애니콜’ 브랜드로 휴대폰 사업 강화에 나선 삼성전자는 과장을 더해 노키아의 안중에도 없었다.
노키아의 승승장구는 딱 거기까지였다.
삼성전자와 블랙베리 등이 신기능으로 무장한 신제품을 지속 출시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2007년 애플의 아이폰 바람은 치명타였다.
2000년대 노키아에게 1990년대의 혁신은 없었다. 2G를 만들어내던 열정 대신 쌓아둔 현금만 믿었다. 저가 경쟁력만 내세운 회사였다. “싸게 팔아라. 어차피 우리는 돈 많다”식의 전략이었다.
부자가 망해도 몇 년은 간다지만 매년 수조원 적자에 노키아의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경영진은 자의든 타의든 회사를 줄줄이 떠났다.
‘서울대 사건(?)’의 올리페카 칼라스부오는 CEO자리를 MS 부사장 출신 스테판 엘롭에게 지난 2010년 넘겼다. 노키아 역사상 핀란드인이 아닌 외국인이 처음으로 CEO 자리에 앉은 사건이다. 고육책이었지만 추락 속도만 빨라졌다.
엘롭 체제에서 스마트폰 분기 판매량 순위는 5위권 복귀는커녕 10위권 수성조차 힘겨웠다. 시장조사기관들의 순위 발표에 노키아는 구체적 수치도 없이 ‘기타’로만 묶인지 오래다. 고가는 삼성전자와 애플에 밀리고, 저가로는 중국산의 상대가 아니었다. 경영진은 매분기 최악 실적을 읽으며 투자자 앞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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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난해 MS에 인수된 것으로 ‘핀란드 노키아’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엘롭은 MS로 복귀해 눈길을 끌었다. 이제는 ‘미국 노키아’가 어느 정도 성장할지가 관심사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개혁을 주저했던 노키아. 다시 뛰어보려고 했으나 너무 늦었고 여러 가지 교훈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