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發 화평법·화관법, 업계 '들었다 놨다'

일반입력 :2013/12/30 17:43

이재운 기자

‘화평법’과 ‘화관법’이 등장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불산 누출 사고 피해자를 위한 대안으로.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로 국내 중소 소재·장비 업체들이었다. 정부가 고심 끝에 협의체를 마련, 업계를 달랬다. 가습기에서 시작된 화학물질을 둘러싼 두 개의 법안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30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 업계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지적에 따라 치열한 협의 끝에 하위법령을 통해 예외 규정을 마련, 업계의 우려를 해소하는 선에서 절충안이 마련됐다.

화평법과 화관법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발생하면서 처음 대두되기 시작됐다. 살균제에 쓰인 화학물질이 산모와 신생아에게 치명적인 폐 손상을 입힌다고 보건 당국이 발표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일부 화학물질에 대한 위험성 표시와 사용 제한에 대해서만 논의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올해 1월 경기도 화성 소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불산 누출 사고로 작업 중이던 협력업체 직원 중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삼성전자는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5월에 또 다시 사고로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져갔다.

이외에도 여타 전자·화학업체들의 화학물질 유출 사고가 이어지자 시민들은 화학물질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요청했다. 그렇게 화평법과 화관법이 탄생했다. 야권 주도의 두 법안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제정됐지만, 업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징벌적인 접근이 문제였다.

화평법은 지난 6월, 화관법은 지난 5월 각각 개정안과 초안이 공포됐다. 업계는 법안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화학물질 사용에 있어 안전을 기하는 것은 굳이 법으로 규제 받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위해 조심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화학물질 유출이 일어날 경우, 당장 자사 임직원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데다 사후 처리 비용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업계가 가장 크게 반발한 부분은 ‘모든 화학물질에 대한 재검사 강제’와 ‘연구개발(R&D)용 소량 물질 등록’ 등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미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 해외 선진국과의 거래가 많은 업의 특성상 업체들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은 이들 국가의 기준이나 국제개발협력기구(OECD) 기준에 의한 시험을 통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두 법안은 기존 검사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물질을 국내에서 다시 검사해 통과한 뒤 등록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걸리는 비용과 시간 모두 만만치 않아 특히 중소 소재·장비 업체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또 100kg 이하의 R&D용 소량 물질에 대해서도 일괄적으로 등록하게 해 시험 기간 소요에 따른 R&D 활동 지연으로 해외 경쟁업체들과의 경쟁에서 큰 타격이 우려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누출 사고가 일어날 경우 매겨질 과징금 규모에 대해서도 ’지나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매출액의 5%’라는 기준은 제조업 특성상 사업을 그만두라는 의미나 다름없다는 주장이었다.

업계의 강력한 반발과 요구에 결국 정부는 한 발 물러섰다.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하위법령을 통한 규제 완화를 약속하고 업계와 지난 8월 관련 협의체를 구성, 이후 격주마다 회의를 개최한 끝에 최근 산업계의 의견을 일부 반영한 절충안을 발표했다.

화평법의 경우 그 동안 논란이 됐던 주요쟁점인 R&D용 물질은 등록을 면제하되 안전관리계획서 제출 등 사후관리를 강화하게 했고, 소량 신규화학물질은 간이등록(제출자료 4개항목 및 3~7일로 기간 단축)으로 하면서 소비자에 위해를 줄 우려가 있는 물질은 추가자료 제출근거를 마련했다. 공급사슬 내의 정보제공 시 영업비밀은 보호하는 방향으로 논의됐다.

화관법의 주요쟁점이었던 영업정지 행정처분은 위법의 정도에 따라 영업 전부 혹은 일부를 정지하고 일부 정지 범위는 업종별 실태조사 등을 통해 상세지침을 마련하기로 했으며, 영업정지를 대신해 과징금 산정 시 적용되는 매출액은 영업정지의 범위로만 한정하기로 했다.

한편 가전업계에서는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 때문에 가습기 판매량이 주춤해진 틈을 ‘에어워셔’가 파고 들었다. 가습기보다 청소가 쉬워 살균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에, 공기 청정 기능도 일정 수준 제공된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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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관계자는 “가습기 살균제에서 불거진 (화학물질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산 누출사고와 맞물려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며 “덕분에 살균제 제조사 외국인 대표(샤시 쉐커라파카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와 삼성전자 사장(전동수 당시 삼성전자 메모리반도체 사장, 현 삼성SDS 사장)가 국회 정기 국정감사에 출석해 사과해야 했을 정도로 일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로 인한 징벌적인 법안이 업계를 옥죄는 상황을 맞을 뻔 했지만, 다행히 정부가 절충안을 마련해줘 다행”이라며 “만족스럽진 않지만 업계까 우려하던 점이 어느 정도 해소된 데 대해서는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