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취급에 관한 두 개의 법률이 전자·화학 업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불산 누출 사고가 잇달아 터지며 사회적인 공감대는 마련됐지만, 추진 과정에서 '지나치게 징벌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것. 정부가 업계의 우려를 반영해 세부사항 등에 유연함을 두겠다고 밝힌 가운데, 하위법령을 통해 현실적인 보완책이 마련될지 주목된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전자·화학 기업들은 법안 통과에 따른 사태 추이를 조심스레 지켜보며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생산하는 대기업부터 여기에 필요한 재료와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사들에 이르기까지 산업계 전반에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은 모두 올해 상반기 국회 본회의를 통과, 오는 2015년 1월 1일부로 시행된다. 화학물질 관리에 있어 안전을 기하자는 취지에는 업계도 공감한다. 업계가 우려하고 있는 부분은 ‘비용 부담’과 ‘시간 소요’ 등 크게 두 가지다.
두 법안이 시행되면 화학물질을 사용 시 대부분의 경우 당국에 일일이 등록 절차를 밟아야 한다. 단순히 이름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질이고 얼마만큼의 양을 사용하는지 모두 밝혀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입증 서류는 모두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 유럽연합(EU) 등 세계경제개발기구(OECD) 내에서 통용되는 포맷도 인정하지 않는다. 연구개발(R&D)에 사용하는 경우도 예외는 없다. R&D 과정에서 수개월을 허송세월 할 수도 있다.
또 사고가 발생하면 매출액의 5%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는데, 이는 제조업의 평균 수익률과 비교하면 '수익 다 내놓고 문 닫아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화평법의 경우 ▲신규화학물질을 연간 1톤 이상 제조, 수입, 판매 시 매년 정부에 보고하고(제8조) ▲이를 정부에 등록해야하며(제8~17조) ▲화학물질의 정보를 제공(제29조~31조)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한다. 화관법은 ▲장외영향평가 시행(제23조) ▲사고 발생 시 매출액의 5%를 과징금으로 부과(제36조) ▲과실치사상 처벌 강화(제57조)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우선 화학물질 등록에 따른 시간과 비용이 업체들에게 큰 부담이다. 중견·중소기업의 경우 이 비용을 혼자 다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반응이다. 디스플레이 관련 화학소재를 생산하는 한 업체 관계자는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역시 비용 문제”라며 “사용하는 화학물질을 등록해야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또 등록자료 작성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비용 못지 않은 문제로 다가온다. 이에 업계는 유럽연합(EU)의 자료인 'EU REACH'를 등록자료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업계관계자들은 “EU REACH의 I UCLID 5 는 EU REACH 이전에 OECD에서 사용되던 시스템인만큼 OECD 가입국인 우리나라도 이를 인정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업체들은 이미 해외 업체와의 거래나 해외 사업장을 운영하며 EU REACH에 대한 대응을 갖춘 상태로, 이미 준비된 I UCLID 5 포맷을 인정해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입장이다.
이외에도 화학물질 등록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최근 3년내 유해성 심사를 통과한 물질조차도 환경부 장관 고시여부에 따라 재심사를 받아야하는 조항 등에 대한 보완책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화관법의 과징금 조항도 지나치다고 업계는 지적한다. 기존에도 최대 3억원 수준의 과징금 조항이 있었고, 미국 등 해외 사례와 비교해도 ‘매출액의 5%’는 “사고 나면 무조건 사업을 접으라는 이야기”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업계는 과징금 현실화와 과징금 범위 세분화, 삼진아웃제 등을 통해 보다 합리적인 기준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재계 관련 단체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지난 12일 저녁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회장 허창수) 회의 이후 나온 발표문을 통해 “최근 논의되고 있는 통상임금,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 등이 기업 현실에 맞지 않고, 투자나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걱정”한다는 우려를 밝히기도 했다.
정부도 이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업계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을 추진하고 있다. 각종 소문과 오해에 대해 해명하는 한편, 지난 7월 산업통상자원부는 화관법·화평법 후속입법 주요쟁점 및 대응 방향에 관한 업계 의견수렴을, 환경부는 화관법 하위법령 개정방향을 발표하며 업계와 소통에 나섰다.
지난달에는 환경부가 화평법·화관법 하위법령 협의체를 구성, 운영키로 했고 산업부도 협의체에 참여할 업체들을 관련 협회의 추천을 받아 확정하고 논의에 나섰다. 29일에는 화학물질 안전관리 협의체 화평법 분과 산업계 사전회의 개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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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법·화관법 하위법령 협의체는 이번달부터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화평법 분과, 화관법 분과, 종합대책 분과 등 총 세 개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는 협의체는 산업계 관련 협회·단체 및 회원사와 민간단체 전문가, 산업부·환경부 등 정부 관계자 등이 참여해 종합적인 논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지난달 27일 국회에서 열린 ‘반도체장비소재 발전전략 정책세미나’에 참가한 업계 대표들은 “지나치게 징벌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한 화관법이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R&D 의욕을 꺾고 있다”며 현장에 자리한 정치인들을 향해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창조경제’를 외치는 정치권과 정부가 업계의 우려를 반영해 현실적인 하위법령이 마련될지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