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텔스타, 위성통신시대 열다 ⑤에코성공과 텔스타

일반입력 :2013/12/23 13:08    수정: 2013/12/28 21:04

이재구 기자

7■에코...대륙 저편의 목소리

1960년 5월 13일 아침.

나사는 장문의 언론 발표를 통해 발사절차와 장비에 대해 설명했다.

“로켓에는 13kg의 기체생성 분말(벤조산과 안트라퀴논 합성물)이 들어있는 담배포장용 셀로판지 절반정도 두께(0.0127mm)인 마일러 폴리에스터로 만들어진 얇은 에코 기구가 실립니다. 아코디언 식으로 접혀 67cm크기의 마그네슘 용기에 넣어집니다. 용기는 델타 로켓 3단부 원형 페어링(덮개) 안에 설치될 예정입니다. 마그네슘 용기는 로켓에서 분리되고 난 후 폭발물질이 터지면서 열리고 그 안에서 기구(풍선)가 나오게 됩니다. 기구 안의 가루는 태양열로 인해 가열되면, 기체로 변해 풍선을 부풀립니다. 에코는 동남 쪽으로 움직이면서 1,690km 상공에서 지구를 돌게 됩니다. 시속 2만5,800km로 2시간에 한바퀴씩 지구를 돕니다. 밤하늘에 떠있는 풍선은 직녀성 정도의 밝기로 보일 것입니다. 나사에서는 발사 150분 시점이면 (동부 뉴저지주)홈델과 (서부 캘리포니아주)골드스톤 간의 첫 통신연결 시도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양 팀이 각 위치에서 볼 때 은빛 위성이 곧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때가 바로 그 시점입니다....”

하지만 이 날 벨연구소는 토르 델타로켓 3단부에 있는 에코1 위성이 궤도진입에 실패했음을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로켓에 실린 풍선은 대기 중에서 불타버리고 말았다.

앞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뱅가드1호를 실은 로켓이 발사대에서 폭발했던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첫 로켓발사 실패의 충격을 추스린 에코팀은 이후 몇 달 간 다시 실험을 거듭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나사가 다시 8월 초로 다음 발사 일정을 잡았지만 이또한 기계적인 문제와 날씨 때문에 연기됐다. 그리고 드디어 8월 11일 밤. 나사로부터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에코(1A)위성을 발사하겠다는 소식이 날아 왔다.

1960년 8월 12일 아침. 플로리다 케이프커내버럴에서 텔레타이프통신으로 카운트 다운을 알렸다. 그리고 오전 5시 39분. 마침내 에코 위성을 실은 델타로켓이 발사됐다. 기구에는 2개의 비콘(beacon) 전송기가 장착됐다.전세계 곳곳의 관측소에서는 시속 2만5,800km속도로 날아가고 있는 지름 30.5m짜리 에코의 상황을 망원경으로 살폈다. 동시에 에코에 탑재된 작은 태양전지로 작동되는 비콘에서 송신되는 통신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107.9MHz로 전송되는 비콘은 거리측정(telemetry)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5개의 니카드(NiCd)전지로 작동되는 배터리는 70개의 솔라셀로 충전되는 풍선이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섬의 관측소가 처음 신호를 받았다. 이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도 신호를 확인했다. 오전 7시5분이 되자 호주의 우메라 관측소에서 보낸 소식이 미 동부 뉴저지 홈델 기지국으로 전해졌다.

“호주 우메라 관측소 신호 확인!”

혼안테나 기지국 책임자 빌 제이크스가 확성기로 에코가 궤도에 진입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클로포드 힐의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부속 건물에서 커피와 도넛을 먹다가 이 소식을 들은 피어스는 안경이 들썩거리도록 뛰며 기뻐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궤도에 들어섰어, 에코가 궤도에 올라갔다고.”

30분도 채 안돼 에코는 미 서부 캘리포니아 골드스톤과 동부 뉴저지 홈델의 시야에 들어왔고 두 곳의 안테나는 자동으로 위성추적을 시작했다. 골드스톤이 미리 녹음해 전송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메시지를 위성을 거쳐 수신한 홈델에서 방송하게 돼 있었다.

1960년 8월12일. 7시 41분 홈델기지국에서는 캘리포니아 골드스톤에 전화를 걸어 대통령의 메시지를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골드스톤의 기지국에서 쏘아올린 마이크로파 신호는 에코를 통해 반사됐고 동부 뉴저지의 거대한 혼안테나로 빨려 들어갔다. 혼 안테나 하부에 설치된 메이저는 위성에서 수신한 신호를 4,000배로 증폭시켰다. 미 서부에서 보내진 아이젠하워의 목소리는 위성을 거쳐 조그맣게 들려왔지만 홈델안테나기지국 메이저를 거친 확성기 소리는 크로포트힐 전체에 뚜렷하게 울려 퍼졌다.

“대통령입니다. 풍선위성 에코를 포함한 이 최초의 통신 실험에 참여하게 돼 개인적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은 미국 우주연구와 참사에 있어 훨씬더 중요한 한걸음입니다. 미국정부는 전세계 인류의 이익을 위해 평화적 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추진해 왔습니다. 이 말을 전하는 풍선위성은 자체적으로 똑같은 실험을 하는 어느 나라든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실험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몇주 전에 널리 배포됐습니다. 이 실험에서 얻어진 우주 과학,탐사 실험결과는 무료로 공유될 것입니다.”

크로포드힐 전체가 환호했다.

연설이 끝나자 빌 제이크스가 캘리포니아 골드스톤 기지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음성이 잘 들리는 것 같은데, 월”

그러자 골드스톤에서는 “좋았어, 빌”이라고 답해 왔다.

미 대륙 양쪽 기지국이 에코풍선위성을 통해 녹음된 음성을 반사한 실험이 무사히 끝난 것이었다.

이제는 에코위성 반사를 통한 무선 전화통신 실험을 할 차례였다.

홈델의 빌 제이크스가 골드스톤으로 전화를 걸었다.

“골드스톤, 여긴 홈델이다. 어떻게 들리나?”

그러자 건너편에서는 “자네 목소리가 똑똑히 잘 들려, 빌”이란 대답이 들려왔다. “오 원더플”

제이크스가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이렇게 에코 통신실험위성 발사실험은 성공리에 끝났다. 하지만 에코팀 존피어스와 빌 제이크스에게 이 성공은 시작에 불과했다.

에코는 발사 첫 해에 지구를 무려 4,481바퀴나 돌았다. 그러는 동안 31미터짜리 10층 건물높이의 기구에는 미세한 주름이 생기고 내부의 기체가 서서히 새 나오기 시작했다. 육안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꼭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전세계는 밤하늘에 생기는 빛의 점선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만 더해 갈 뿐이었다.

벨연구소는 뉴욕에서 에코를 볼 수 있는 시간안내 전화서비스를 만들었다. 일부 신문은 이 일정과 시간을 게재할 정도였다.

이렇게 200만달러와 36명의 인력이 투입된 작은 배터리 송신기를 장착한 반짝이는 대형기구 에코는 자신의 성과와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스의 수동통신 위성 에코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존 피어스는 벌써 다음 위성을 쏘아 올릴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에코는 거의 8년 동안 하늘에 떠 있다가 1968년 5월 24일 저녁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 어딘가로 사라졌다.

8■텔스타 논의의 시작

“존, 당신이 나를 어떤 상황에 밀어 넣었는지 좀 보시오.”

에코 발사 프로젝트가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1년 벨연구소 머레이힐 강당. 존 피어스박사를 만난 AT&T 회장 프레데릭 카펠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화통한 미네소타 출신 카펠 AT&T회장의 말은 에코발사 성공 이후 1년 만에 위성이 흥미로운 실험 차원에서 치열한 비즈니스로 바뀌었고, 업계의 관심을 끌게 됐다는 얘기였다.

포춘지는 이 해 6월호에서 “이미 수많은 다국적 기업, 그 중에서도 RCA.GE. ITT가 어마어마한 위성을 우주에 설치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사실 피어스의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전까지는 벨연구소의 노력이 통신업계에서조차 외면받고 있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피어스와 크로포드 힐 사람들이 경쟁자없이 에코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해 준 셈이 됐다.

앞서 AT&T와 영국우정성 및 프랑스정부는 1956년 9월 25일 공동으로 대서양 해저통신선을 개통했다. 하지만 AT&T 벨연구소의 위성통신개발소식에 간절히 협력을 원하고 있었다. 개통된 해저통신케이블은 미국, 캐나다와 영국 간 대서양전화선을 36회선 공급하는데 그쳤다. 그나마 회선의 대부분은 미국과 캐나다, 영국에게 돌아갔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스위스가 몇 개 회선을 확보했을 뿐이었다. 미국 50%,영국 40%,캐나다10%로 만들어진 만큼 당연한 결과였다. 그게 3년간 1억3천만파운드를 들여 고생 끝에 만든 대서양 해저케이블의 결실이었다. 위성은 점점부담이 되고 있는 해저케이블을 대신해 줄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더욱이 위성은 전화통신 밖에 안되는 대서양 해저케이블과 달랐다. 불가능한 TV실시간 방송도 가능하게 해 줄 희망이었다.

카펠은 US뉴스앤월드리포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질적으로 최적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위성을 50개 정도 띄울 계획입니다.”

기자가 “AT&T가 그렇게 하기 위해 2,500만달러나 되는 돈을 써야 합니까?”하고 정색했다.

그러자 카펠은 “제가 장담하건대 그것보다 더많이 들어갈 겁니다”라고 대꾸했다.

카펠은 위성통신을 띄우는데 드는 예산을 2억달러로 잡고 있었다. 그의 지론은 “아무리 큰 돈이 들어도 통신위성은 궁극적으로 대서양횡단 전화에 드는 비용을 낮춰 준다”는 것이었다.

카펠은 AT&T의 막대한 자금을 커다란 은빛의 에코보다 훨씬더 효율적인 능동위성 구축에 쓰고 싶어했다.

피어스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텔스타라는 이름의 이 능동위성은 지상에서 쏘아올린 전파신호를 10억배로 증폭시켜서 지구의 다른 주파수대로 재전송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수백 회선의 전화통화는 물론 여러 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동시에 전송시켜 줄 하늘 위의 중계기가 될 것이다.”

사실 액티브 위성 텔스타에 대한 아이디어는 에코가 발사되기 이전인 1959년 8월 24일에 나왔다.

벨연구소의 로이 틸롯슨은 지상 2,500마일(4,000km)상공에 위성을 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성은 1와트(W)의 전송기 출력을 가지는 것으로 가정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100MHz 대역의 FM주파수 대역을 사용하도록 돼 있었다. 이대로라면 하나의 TV채널과 수백개의 전화회선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피어스 팀에게 또다른 기회가 온 것 같았다.

벨연구소의 연구팀은 토론을 시작했다.

“텔스타가 가동만 된다면 세상은 AT&T와 벨연구소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텐데...”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능동위성을 얼마나 높은 궤도로 올리느냐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우주통신 주도권을 놓고 경쟁자로 떠오른 RCA, GE,휴즈같은 기업들은 몇 개의 위성을 쏜다면 지구의 자전속도와 보조를 맞출 3만6,000km 상공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같은 정지궤도위성(geostationary satellite)은 지구에서 볼 때 지구 자전 속도와 같이 돌아 하늘의 특정지점에 머무르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나 지상의 신호를 전송할 수 있는 위성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높이 위성을 쏘아올려 줄 로켓을 만들 기술이 아직없다는 점이 꼽혔다. 존 피어스가 1954년 처음으로 통신위성 발사할 마음을 먹은 이후로 로켓기술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더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3만6,000km상공의 위성을 거쳐 전화통화를 하려면 전파신호가 오가면서 약 0.6초의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점도 우려되는 요소가운데 하나였다. 벨연구소 연구원들은 실험을 통해 전화통화시 시간차와 노이즈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짜증과 불만을 표시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벨연구소 연구팀은 결단을 내렸다.

“현재로선 능동위성의 궤도를 최고 4,830km상공으로 제한하는 것이 최선이다.”

1959년 8월 로이 틸롯슨의 텔스타 구상과 똑같았다.

이 때부터 텔스타위성 제작작업은 급물살을 탔다.

텔스타에 들어가는 부품만 1만5,000개였다. 송신기만을 부착해 단순히 전파를 반사해 내는 에코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사가 청구한 텔스타 로켓발사 비용만도 300만달러였다. 이 프로젝트에 500명의 벨연구소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투입됐다.

당장 벨연구소가 일반 소비자 대상으로 수익나는 전화용 통신위성을 만들기엔 아직 너무 일렀다. 텔스타의 최대 과제는 벨연구소가 능동위성을 설계 개발하고 전개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데 있었다. 이를 통해 향후 제기될 신뢰성 문제를 최소화시키는 게 목표였다.

이를 통해 AT&T가 계획 중인 대규모 위성사업에서 경쟁사에 밀려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해저 케이블 건설만큼이나 복잡하면서도 개발기한은 훨씬 더 짧았다. 그만큼 작업하기가 더 힘들었다. 게다가 위성에 들어가는 1만5,000개 부품 가운데 단 하나도 오작동이 있어선 안됐다. 단 하나의 실수라도 나면 그걸로 위성은 끝이었다.

“부품 하나하나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흔들고 비틀어봤고, 우리스스로에게 모든 부품이 로켓발사의 진동에도 견디고 대기권 밖에서도 확실히 무사할 수 있을 정도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 전기적, 물리적 테스트를 계속 했습니다.”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오닐은 후일 이렇게 텔스타 부품을 테스트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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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 연구팀은 텔스타에 별도로 특수한 반도체 다이오드부품도 여러 개 장착했다. 통신실험 외에 우주의 온도나 방사선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렇게 얻어진 정보는 지상의 벨연구소에 전송될 예정이었다. 텔스타는 직경 87.6mm였고 무게는 성인 남자와 비슷한 77kg이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