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모바일 게임의 잽과 훅

기자수첩입력 :2013/10/11 09:53    수정: 2013/10/11 11:38

남혜현 기자

1963년 6월 18일,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사각의 링 위에 '세기의 선수' 무하마드 알리(당시 이름 캐시어스 클레이)가 올랐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알리는 그간 '주저앉아본 적 없는' 무패의 신화였다. 빠른 발과 경쾌한 잽에 상대 선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날, 알리의 상대는 영국 복서 헨리 쿠퍼였다. 공이 울리고 알리는 특유의 스텝을 밟으며 경기를 이끌었다. 가드를 올린 쿠퍼는 잽을 피하기 바빴다.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알리가 이변 없이 승리할 것으로 보였다.

4라운드 후반, 일은 터졌다. 잽을 흘린 쿠퍼가 체중을 실은 묵직한 레프트 훅을 날렸다. 알리는 그대로 넘어졌다. 그가 상대의 주먹에 처음 주저앉은 날이다. 알리는 승리를 지켰다. 그럼에도 패배한 쿠퍼의 레프트 훅은 권투사 명장면으로 남았다.

권투는 백인 중심의 스포츠 무대를 흑인이 가장 빨리 정복한 종목이기도 하다. 알리를 비롯해 잭 존슨, 타이슨 등 수많은 흑인 선수가 권투로 스타가 됐다. 챔피언은 자주 흑인의 몫이다. 뒤집어 말하면, 돈 많이 드는 다른 운동 대비 권투의 진입 장벽이 낮다는 뜻도 된다.

모바일 게임은, 얼핏 권투와 닮았다. 우선 진입장벽이 낮다. 수년간 수십억에서 수백억원을 쏟아 부은 '대작' 온라인들과 비교하면 모바일은 적은 투자로 큰 수익을 낼 수 있다. 고작해야 2~3명이 의기투합한 중소 벤처가 스타로 떠오르기도 한다.

운영 스타일도 그렇다. 카카오 게임하기란 링 위에서 개성 있는 잽을 잘 날리면 강적도 쓰러 KO시킬 수 있다. 상장을 앞둔 애니팡도, 일본을 뒤흔든 포코팡도 30대 초반 청년들이 만든 작은 게임이었다. 쿠키런, 명랑스포츠 모두 온라인 게임이 주도하던 지난해까진 마이너 영역에 속한 소규모 업체에 불과했다.

올해 모바일 게임 업체들의 성과는 눈부시다. 트렌드를 읽는 경쾌한 스텝, 비 게이머를 끌어들이는 짧은 호흡의 재미로 시장 주도권을 온라인에서 빼앗아 왔다. 상장을 앞둔 업체들도 생겼다. 단기적으론, 하루 수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게임이 언론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국내 시장만 놓고 보면, 우리 기업들은 모바일 시장서 적절히 대처했다. 플랫폼이 생기자 때를 놓치지 않고 이용자들의 마음을 빼앗게 게임을 만들어냈다. 스마트폰과 메시징 앱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게임이 잘 파고들었다. 유례없는 일이라 해외서도 관심을 쏟을 정도였다.

그런데 벌써 '포화' 소리가 들린다. 우리나라 인구는 5천만. 인기 게임의 다운로드 수는 2천만을 넘어선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말. 영유아와 노년층을 제외하면, 스마트폰을 쓰는 청소년과 성인들은 대부분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다.

때문에 이제 우리 모바일 업체들은 해외로 눈을 돌린다. '헬로 히어로'로 모바일 역할수행게임(RPG) 시장 가능성을 확인한 핀콘은 북미 시장 진출을 위한 준비 중이다. 내달 출시를 목표로, 뉴욕서 열리는 코믹콘에서 시장 테스트를 위한 코스프레 행사도 열었다. 게임빌이 서비스하는 '트레인시티'는 페이스북 게임센터의 첫 출시작으로 들어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국, 일본 시장 노크는 더 가파르다. 윈드러너, 드래곤플라이트 등은 라인을 타고 일본 시장으로 넘어갔다. 중국 최대 게임 인터넷 업체 텐센트도 우리나라 개발사들의 게임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360 등 안드로이드 마켓과 제휴한 게임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다만, 아직까지 해외서 크게 성공한 우리 게임의 소식을 듣기는 힘들다. 애초에 해외서 먼저 성공해 국내로 역진출하는 포코팡을 제외하면 말이다. 물론, 우리 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타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른 지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시기를 놓치면 모바일 게임 시장 주도권을 빼앗길까 조바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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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출 1조원을 눈앞에 둔 슈퍼셀도, 처음부터 슈퍼셀은 아니었다. 킹닷컴도 마찬가지다. 클래시오브클랜, 캔디크러시 사가라는 걸출한 타이틀로 전세계 게임 시장에 선 굵은 훅을 날리며 단숨에 모바일 대가로 자리잡았다. 자본이 적어도, 인력이 많지 않아도, 괜찮은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확보하면 중량감 있는 훅을 만들어 낸다.

우리에게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국내 시장서 잽으로 승리해 본 경험 있는 개발사들이 많다. 모바일은, 전세계 게임 시장서 우리 기업들이 선전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다. 한국판 슈퍼셀이 훅을 날리는 그 순간을, 기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