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하늘을 나는그림...TV의 발명①:RCA제국총수의 야망

일반입력 :2013/01/28 06:00    수정: 2014/07/22 18:37

이재구 기자

1927년 9월7일, 파일로 판즈워스의 브라운관TV

1■타이타닉호의 사고를 전했던 RCA총수의 야망

“저는 라디오를 피아노나 축음기처럼 가정용 제품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아이디어란 다름아닌 음악을 무선으로 가정에 보내는 겁니다.”

타이타닉호 침몰 3년후인 1915년. 24세 한 청년이 자신의 회사 아메리칸 마르코니 총 지배인에게 이런 야망을 담은 비망록을 보냈다.

당시만 해도 무선은 통신회사의 무선통신(텔레그래프), 해군의 통신용, 또는 상선의 통신기용 등 산업, 군사용으로만 사용됐다.

그는 1921년 7월 1차대전이 끝나자 심심해진 미국인들에게 잭 뎀프시와 조지 카펜티어의 100만달러짜리 상금이 걸린 헤비급복싱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했다. 세기의 타이틀매치 중계는 성공적이었다. 그 해 겨울 미국전역은 라디오 수신기세트 구매 열기로 뜨겁게 달궈졌다. 1년 전 디트로이트 방송국에서 미국 최초의 뉴스속보를 시작했을 정도로 라디오는 초창기였다.

이를 계기로 청년은 가전개념의 라디오 수신기(라디오세트) 전성시대를 연 선구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타이타닉 침몰 때인 1912년 당시 21살의 나이에 아메리칸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에 고용됐던 데이비드 사노프(1891~1971)였다. 침몰중인 배에서 나온 모스부호 신호를 통해 생존자의 명단을 사흘간 받아 적어 세상에 최초로 전한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지며 승승장구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밝힌 라디오에 대한 뜨거운 야망은 불변인 듯 싶었다. 하지만 변화가 감지됐다.

1900년대 이후, 특히 192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약 20년간 과학자들의 상상력은 '날아다니는 사진을 주고받는 기계'의 기술적 실현을 향해 급속히 다가가는 듯 보였다. 이들은 텔레바이저, 텔레비전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RCA제국의 사령관도 미래를 향해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사노프는 라디오 제국 RCA를 또다른 어떤 미래 산업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넘어설 또다른 가능성과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는 이 해에 “나는 텔레비전이 무선(라디오)를 통해 보고 듣는 다른 이름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당연한 코스를 향해 가게 될 것이다”라는 후세에 남을 유명한 예언적 메모랜덤을 쏟아냈다.

4년 후인 1927년 4월 8일. 이 날 자 뉴욕타임스 1면 머릿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은 감격스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멀리있는 연사가 여기서 들릴뿐 아니라 보인다. 마치 사진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Far off speakers Seen as well as heard here:like a photo come to life.)”

기사 본문은 다음과 같았다.

“허버트 후버 장관이 어제 오후 워싱턴에서 연설을 했다. 뉴욕 청중들은 그의 모습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연설자와 청중간에 200마일 이상의 공간이 떨어져 있음에도 마메리칸텔레폰앤텔레그래프(AT&T) 산하 벨 연구소가 개발한 기계식TV가 공식적인 최초의 시연을 했다.

이 기기는 후버씨의 이미지를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초당 18번의 이미지로 전송했다. 음성을 재생산하는 중에 이 이미지가 동영상처럼 스크린으로 쏘아졌다.

각 음절이 들리면서 연설자의 입술동작과 그의 표현변화가 베쑨 스트리트55번가 AT&T 벨연구소 데모룸에 비춰졌다. 텔레비전 사진이 최초로 2X3인치 스크린에 투사됐을 때 매우 뛰어나 보였다.

사진이 갑자기 살아나 말하고, 웃고 머리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스크린이 2X3피트로 늘어나자 화면은 좋지 않았다.... 때때로 장관의 얼굴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설문을 읽을 때 아래를 보았고 전화수신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 아래쪽 대부분이 가려졌다.

스크린 뒷쪽에서는 너무 강한 조명이 비쳤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움직였을 때 그의 특징을 분명히 분간 할 수 있었다. 그가 연설을 거의 끝낼 즈음에 그는 자신의 머리를 한쪽으로 돌렸고 얼굴모습은 분명하게 모든 모습의 세부부분을 상세하게 보여주었다.”

이듬 해인 1928년 1월 GE와 RCA는 텔레비전 수상기 3대를 생산해 일반에게 공개했으며 5월에는 GE뉴욕 슈넥타디 방송국이 일반에게 공개했으며 1주일에 3일 간 하루 3분씩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게 됐다.

1929년 가을. 런던 BBC에서도 기계식 TV방송이 시작됐다. 미국에는 이미 26개의 방송국이 설립됐다. 그러나 1929년 10월29일 검은화요일로 알려진 증시폭락을 기폭제로 해 시작된 대공황은 막 일기 시작한 (기계식)텔레비전 붐에 찬물을 끼얹었다.

1930년 사노프가 RCA의 사장이 됐고 2년 후 NBC TV방송국을 설립했지만 TV는 아직 라디오의 보조매체였고 실험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대공황은 라디오 번영의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TV에서는 달랐다. 오히려 경제적 부진은 TV보급을 지체시키며 그 본거지를 미국에서 유럽으로 이동시켜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RCA의 데이비드 사노프가 나섰다. 1935년 5월7일 그는 RCA주주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100만달러를 투자해 TV를 실용화할 것입니다.”

이미 독일에서는 1933년 집권한 히틀러가 왕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TV개발에 나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전자식 TV로 중계할 정도였다. 독일과 더불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등의 나라들도 1930년에 비약적인 TV기술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미국의 TV시장은 기술이 있었음에도 기계식에서 한걸음도 못 나아간 채 거의 빈사상태에 머물렀다.

2■세계 라디오방송의 제왕 RCA총수의 선언

TV라는 새로운 매체를 과시하고 싶은 데이비드 사노프 RCA총수의 욕구는 4년후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39년 4월30일뉴욕세계박람회장. 뉴욕 퀸즈카운티 플러싱메도우 코로나파크의 오후 12시30분.

내일의 세계(The World of Tomorrow)란 슬로건 아래 펼쳐진 뉴욕 세계박람회장 개막 첫날은 한낮의 태양아래 열린 개막식 임에도 63개국에서 온 20만8천명의 관객이 운집했다.

이 날 오후 12시 30분 개막연설을 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모습이 뉴욕시에 이미 보급됐던 200대의 TV수상기를 통해 생생하게 방송으로 중계됐다. 이로써 루즈벨트는 TV방송에 출연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됐으며 뒤이어 연설을 한 데이비드 사노프는 TV산업의 밝은 전망을 역설하고 또 그걸 현실화하면서 훗날 미국 텔레비전(방송)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념사에 이어 당시 미국 방송을 호령하고 있던 미국 라디오산업의 제왕 데이비드 사노프 RCA회장이 이날 행사에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제가 이 나라에서 사회전반에 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이처럼 중요한 새로운 기술의 탄생을 발표하는 자리에 서 있다는 데 대해 숙연함을 느낍니다. 이 기술은 이 어려운 세상에서 희망의 횃불처럼 빛나는 기술입니다. 이 기술은 우리가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용법을 배워야만 할 창조적 힘입니다....이젠 듣는 것에 보는 것까지 더해집니다.”

훗날 사령관이란 별명을 얻게 될 RCA제국 총수의 연설은 바로 미국에 전자식 텔레비전 상업방송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었다.

앞머리가 벗겨진 48세의 데이비드 사노프 RCA회장은 기름지고 자신에 찬 낮은 목소리로 진공관 모양으로 만들어진 RCA파빌리온 앞에서 미국 전자 TV시대의 도래를 이렇게 감연히 선언했다.

꼭 16년 전 자신이 예언했던 그 시대의 도래를 자신이 직접 세상에 확인시키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앞서 그는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개막식 10일 전에 이미 뉴욕박람회 RCA파빌리온에서 사전 연설을 했고 TV로 중계된 그의 연설은 예상대로 언론의 각별한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미 기계식 TV를 구경한 극소수의 사람들 조차도 그처럼 또렷한 화면은 본 적이 없었다. 여전히 대다수 세상 사람들은 그런 기계(TV)가 지구상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NBC가 자체 편성 프로그램에는 오페라,만화,요리시범, 여행,패션쇼, 록펠러센터앞의 스케이터 등의 모습을 망라해 소개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미국최초의 TV방송국 송출이었다.

뉴욕박람회 방문객은 RCA파빌리온으로 들어가면 텔레비전 홀(Hall of Television)을 볼 수 있었다.

전년도인 1938년. 앨런 듀몽이란 이름의 발명가이자 사업가가 세운 앨런 B.듀몽 연구소가 이미 최초의 14인치 전자식 TV세트를 뉴욕박람회에 앞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사노프는 그보다 몇달 지나서야 그것도 12인치 TV를 만드는데 만족해야 했다. 듀몽은 진공관 증폭기를 만들어 유명해진 발명가 리 드포레스트의 회사에서 진공관 라디오를 만들던 기술자였다. 이들은 개인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만들어 보내고 있었다.

RCA는 뉴욕세계 박람회에 자사의 TV수상기를 전시 소개했다. RCA TV연구소(Television Laboratory)에서 실험용 TV카메라진공관 아이코노스코프와 수신화면용 브라운관인 키네스코프를 출품했다.

하늘위에서 내려다 보면 오목렌즈처럼 된 평면위로 진공관이 솟아오른 모습의 RCA파빌리온 안에 내일의 라디오거실(Radio Living Room of Tomorrow)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라디오 텔레비전, 레코드플레이어, 레코드 레코딩세트, 팩시밀리 수신기 등이 전시돼 있었다. 모델룸을 만든 이태리설계자 바소는 4개의 일반인용 TV수상기 4대를 배치해 법적 허가도 받지 않고 모델룸에다 “Radio Living Room of Today”라는 이름의 전시룸을 꾸몄다.

여기서 관람객들은 RCA가 만든 최고의 TV수상기 TRK-12가 작동하는 것을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름 5인치짜리 브라운관 CRT을 가진 제품이었다 여기서 비쳐지는 화면은 3X4인치크기였다.

RCA전시관 앞에는 RCA레코드축음기로 음악을 듣고 있는 유명한 강아지 니퍼(Nipper the Dog)의 상이 자신의 주인의 소리를 듣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방문객들은 내부 폐쇄회로 TV화면을 보기 위해 몰려 들었다. 희망자들은 원하면 외부에서 직원과 함께 들어와 외부에 있는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 텔레비전 방송에 나왔다”며 기념품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RCA가 제공한 4종류의 텔레비전 수상기는 1939년에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TRK-12,TRK-9,TRK-5,TT-5 등 4종류의 제품이 그것이었다. TT-5는 모두를 위한 제품으로서 볼 수만 있는 테이블모델이었다. 이들의 가격은 199.50달러에서 600달러로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다.

이제 남은 유일한 문제는 TV프로그램을 어떻게 파느냐에 있는 듯 보였다.

최초의 TV광고는 부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TV시청자들이 이브닝드레스와 가운을 입고 TV를 보는 시청자들이 묘사되고 있었다. 존 바소라는 인물은 전시장과 RCA TV세트 디자인까지 책임졌다.

그는 ‘미국의 가정(America at Home)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 관람객들은 이들 TV를 통해 채널이 1~5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뮤직코너(Musicorner)는 마호가니 나무로 된 상자에 간접광,사운드보장, 16mm사운드필름 프로젝터, 라디오,전축 및 TV수상기를 포함하는 TV세트였다.

RCA뿐이 아니었다. 뉴욕 세계박람회장에 참가한 웨스팅하우스일렉트릭과 제너럴 일렉트릭도 자사의 파빌리온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이제막 TV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들 회사는 또한 인터뷰를 위한 생방송 카메라를 설치한 생방송 스튜디오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제 전자식TV는 뉴욕 메트로 폴리탄에 소재한 메이시백화점과 ,블루밍데일스, 그리고 워너메이커 백화점 등에서 팔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RCA제왕 데이비드 사노프 회장의 선구자적인 TV보급 노력은 이듬해 열린 세계박람회(1940년)에서도 지속됐고 이제 TV전시공간은 전년도보다도 2배나 넓은 장소에서 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1939년 뉴욕박람회는 라디오세트를 군사산업용에서 가전제품으로 승화시키는 절대적 기여를 한 사노프가 TV를 향해 힘차게 나간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이 날은 훗날 미국 텔레비전의 탄생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날이 됐다.

하지만 TV가 활성화되려는 그 결정적인 해에 발발한 2차세계대전은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판매는 지지부진해졌다. 1938~1941년에 만들어진 TV는 재고로 남겨져 전쟁후에 팔릴 정도였다. 하지만 1930년대말에 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TV기술은 2차대전으로 중단됐다가 다시 꽃피기 시작할 TV기술의 전성시대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1945년 9월2일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났을 때 미국내 TV수상기의 수는 7천대에 불과했으나 10월8일 정부가 텔레비전 방송국 설립과 수상기 제조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함에 따라 텔레비전은 곧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됐다. 1946년부터 TV수상기는 대량생산에 들어가 백화점의 주요 상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RCA 자회사 TV제품 뿐만 아니라 NBC는 전 미국인들에게 전자식 TV를 통한 방송시대를 열어 주었다.

하지만 이 대단한 국제적 행사에서 소개된 이 멋진 미래의 기기를 발명한 TV의 아버지는 실상 데이비드 사노프 RCA회장이 아니었다.

세계최초의 전자식 TV를 개발한 주인공은 아이다호에서 갑자기 TV주사선의 원리를 머릿속에 떠올려 이를 구체화한 미국의 젋은 천재 파일로 T. 판즈워스였다. 사노프는 RCA의 독자적인 전자식TV발명의 실패가 이어진 끝에 판즈워스를 상대로 한 수상쩍은 발명에 기반한 특허소송, 그리고 그 소송의 패배 끝에 이 천재의 특허를 크로스 라이선싱하면서 미국 TV산업의 물꼬를 튼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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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보다 앞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계식 TV를 만들어 전자식TV시대 이전 짧은 기간이나마 많은 사람들에게 날아다니는 그림의 꿈을 눈앞에 보여준 선구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최초로 기계식 TV를 최초로 개발해 상업화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업가 존 로기 베어드(1888~1946)였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