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튀김 수렴공식’
지난해 한 개발자 컨퍼러스에서 개발자들의 가슴을 후려치는 PT 슬라이드 한 장이 등장했다. 개발자들은 코드를 짜는 코더, 프로그래머, 아키텍트, 연구소장을 거쳐봤자 결론은 닭집 사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자조다.
표현은 코믹하지만 비전 없는 현실은 씁쓸하다. 해당 슬라이드가 순식간에 IT업계 종사자들의 공감을 얻으며 이슈가 된 것도 개발자들의 근무 환경이 척박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발자들이 손을 놓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좋아서’ 시작한 개발인 만큼, 발전하고자 하는 열망은 여느 직종에 뒤지지 않는다. 최근 IT 업계에서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컨퍼런스가 열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술과 노하우의 공유로 함께 발전하자는 취지다.
전윤호 SK플래닛 플랫폼기술원장(CTO)은 지난해 초까지도 자신이 직접 코드를 짰다. 처음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것이 지난 1981년, 거의 30년을 개발자로 살아온 셈이다. 지금은 이름 뒤에 거창한 직함이 붙었지만, 본바탕은 어디까지나 ‘개발자’다. 자연히 개발자들의 어려움, 개발 환경 등을 잘 알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글로벌’이다. 충분히 많은 이용자를 대상으로 서비스 해야만, 즉 마켓이 커져야 개발자 처우가 좋아질 것이란 논리다. 언뜻 생각하면 가장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간단한 해답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개발자, 글로벌이 목표다
“지금의 개발자 환경은 종사자들의 마음가짐이나 정책 한 두 개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닙니다. 결국 규모의 경제를 가져갈 수 있을 때 좋은 개발자들이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죠. 우리나라는 시장 규모가 크지 않지만, 글로벌로 눈을 돌려 많은 이용자를 대상으로 서비스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필요한 일이다. SK플래닛이 ‘글로벌’에 방점을 찍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 원장은 “우리나라 개발자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하고 싶다”며 “이 과정에서 개발자들을 많이 뽑는 동시에 써드파티 개발자들과 상생하는 에코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오는 14일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호텔에서 열리는 개발자 대상 행사 ‘테크플래닛’을 해외 연사를 위주로 꾸민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개발자들이 굳이 해외 컨퍼런스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글로벌 ICT 기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이 전 원장의 바람이다.
이날 행사는 글로벌 IT 리더 구글, 페이스북 엔지니어가 직접 참여하는가 하면, 어댑티브패스, 안드로이드판 시리(Siri)로 각광받는 말루바 등 글로벌 스타트업 기업들이 각자의 필살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전 원장은 우리나라와 해외의 개발환경의 차이로 두 가지를 꼽았다. 본인이 와이더댄-리얼네트웍스로 이어진 외국계 기업에 몸을 담은 경험에서 직접 느낀 차이다.
“하나는 개발자가 코드 짜는 것을 넘어 기획, 디자인까지 담당한다는 점이에요. 서비스가 인터페이스(UI), 사용자 경험(UX) 등 여러 측면에서 일관성을 가지는 이유죠. 나머지는 제품이 좋으면 마케팅 등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마인드입니다.”
반면 국내의 경우 개발은 개발대로, 마케팅은 마케팅대로 따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개발에는 문외한인 회사 임원들이 프로젝트를 엎어버리는 일도 다반사다.
“BX라는 말이 있습니다. UX가 사용자 경험이라면 BX는 boss experience, 즉 ‘사장님 경험’이란 말이죠. 개발의 초점이 오로지 임원의 결재에 달려있는, 참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 말입니다.”
■SK플래닛, 오픈플랫폼으로 진화…“핵심은 개발자”
그렇다고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환경을 구성하는 동시에 바꿀 수 있는 이들 역시 개발자들이다. 전 원장은 개발자들에게 플랫폼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가입자 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인 플랫폼이 만들어질 때 초기에 활용을 잘 해야 한다는 얘기다.
“플랫폼이 생기면 초기에는 블루오션이에요. 페이스북-징가, 카카오톡-애니팡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레드오션화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애플, 구글의 생태계가 강력하다고는 해도, 10년 이상 가는 플랫폼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정말로 실력으로 경쟁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거죠. 사실 이때쯤에는 SK플래닛이 치고나갈 수 있지 않을까도 기대하고 있습니다.(웃음)”
SK플래닛 역시 오픈플랫폼으로 진화 중이다. ‘테크플래닛’ 이틀 후인 오는 16일에는 오픈플랫폼 ‘플래닛 엑스’를 공개하는 행사도 연다. 외부에 개방하는 API들을 정리하고 오픈 폭을 넓히며 하나의 플랫폼을 일원화된 창구로 개방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API를 공개한 데 이어 T스토어, 틱톡, T맵, T클라우드 등 이들 주요 8개 서비스를 하나의 아이디로 쓸 수 있는 SK원아이디도 도입했다. 조만간 SK원아이디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코멘트 플러그인 서비스도 내놓는다. 전 원장은 이들 플랫폼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써드파티 개발사가 나타나길 고대 중이다.
지금의 SK플래닛 상황은 ‘백조의 발’로 요약된다. 주변에서는 출범한지 1년이 지났는데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는 지적들이 슬금슬금 나온다. 조바심이 날 만하다. 빨리 무언가 성과를 내놔야 한다는 압박감도 작용할 것 같다.
전 원장은 “워낙 큰 조직이기 때문에 벤처처럼 빠르게 변할 수는 없다”고 인정했다. 다만 지난 1년, 외부에서는 볼 수 없는 내부 조직은 굉장히 많이 변했다는 설명이다. 기존에는 없었던 개발조직부터 만들었다. 외주를 줘서 개발해야 했던 것들을 내부 개발 쪽으로 돌렸다.
없던 조직을 만들다보니 개발자 채용이 급선무다. 분사 이후 1년 동안에만 100여명 이상의 개발자가 새로 SK플래닛 사원증을 받았으나, 아직까지 모자라다. 전 원장은 기자와 만난 이날 오후에도 개발자 채용 인터뷰가 예정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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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플래닛의 목표는 ‘한국의 구글’입니다. 단순히 서비스를 하는 서버가 있다는 것을 넘어서 에코시스템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내부 기술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거죠. 특히 플랫폼은 기술력이 확보되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습니다. 요즘 플랫폼은 인프라 레벨까지 경쟁력을 갖춰야 하지 않으면 서비스를 주도할 수 없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전 원장은 기자에게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SK플래닛 임원면접이 까다롭더라’는 소문이 돈다”며 “그 과정을 거쳐 뽑힌 SK플래닛 개발자들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신 있는 능력자들”이라고 자랑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