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디지털 고수, 세상 밖으로 나오다

문화 입은 IT, 시대를 비추다④

일반입력 :2012/06/18 15:14    수정: 2012/06/19 09:07

남혜현 전하나

디지털 시대는 만화 보는 습관을 바꿨다. 손에 침을 묻혀가며 한장 한장 넘겨보던 만화는 이제 스크롤을 내리면서 다음 페이지를 클릭하는 웹툰이 대신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종이 대신 디지털 화면으로 읽는 글에 익숙해졌다. 스마트폰, 태블릿이 곧바로 서점이자 도서관이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출판계는 향후 도서 시장을 활성화시킬 촉매제로 전자책을 주목한다. 전자책 시장은 아직 작은 규모지만 고무적이게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전자책으로 접하는 콘텐츠도 크게 늘었다.

소설이든 만화든, 수많은 작가들이 디지털 출판에서 기회를 보는건 이런 이유다. 더 많은 이야기꾼들이 작가로, 더 많은 아이디어들이 작품으로 세상에 태어나야만 도서 시장에도 희망이 생긴다. 10개의 작품보단 100개의 작품에서, 또 1천개의 작품에서 읽을만한 거리가 풍성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디지털은 숨어 있던 고수들을 세상에 나오게 했다. 혼자서 펴낸 책과 그림이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는 시대다. 디지털 출판으로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훔친 작가들을 만났다.

■신춘문예 아니어도 작가 될 수 있다

안근찬 작가㊼는 지난해 출판사 '안북'의 대표가 됐다. 사무실은 지리산 농가. 서울 근교도 아니고, 전문 출판 편집인을 두지도 않았지만 올해 10권이 넘는 책을 펴낼 계획이다. '전업 작가'로 살 수 있을 만큼 책도 팔린다.

전자책 출판은 인터넷만 연결되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죠. 굳이 서울이나 수도권에 사무실을 두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아예 사무실이 없어도 문제가 안되죠. 제 경우엔 노트북 한 대와 인터넷망만으로 꾸준히 전자책을 출간하고 있어요. 종이책 출판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안 작가는 지난 3월 지리산 농가 한 귀퉁이를 얻어 사무실을 옮겼다. 종이책 출판에 미련을 버리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자신의 책을 포함, 벌써 70권이 넘는 책을 전자책으로 펴냈다. 스타 작가가 아니라면, 평생 자신의 책 한 권 내기 힘든 종이책 시장이다.

매출이 보장되지 않는 무명 작가의 작품을 흔쾌히 출간해줄 출판사는 거의 없어요. 작가지망생들은 신춘문예나 공모전을 통한 등단을 최우선으로 여기죠. 그런데 전자책은 달라요. 누구나 출간할 수 있고, 출판사를 경영할 수도 있죠. 보다 넓은 소통의 장이 전자책 시장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출판계엔 '종이책 작가'를 우선으로 치는 분위기가 크다. 이런 상황에서 안 작가가 전자책으로 방향을 튼데는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명분이 있다. 굳이 전자책과 종이책을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전자출판이 더 다양한 기회로 더 많은 정보를 독자에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문학의 기본 가치가 활자를 통한 정보전달이라 말한다. 여기엔 예술적 가치도 포함된다. 문제는 문학을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 더 쉽게 전달하느냐다. 전자책은 접근성 면에서 종이책보다 유리하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만 있으면 서점에 가지 않아도 언제든지 책을 구매해 읽을 수 있다. 작가 뿐만 아니라 독자에도 파격적인 변화다. 안 작가는 전자책은 작가와 독자간 쌍방 소통이 훨씬 쉽고 편하게 이뤄진다며 이는 문학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안 작가는 '이펍(ePub)' 형태의 전자책을 직접 제작한다. 여러 종류의 웹에디터가 많이 보급됐기 때문에, 파워포인트나 한글을 쉽게 다룰 줄 안다면 이를 활용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다만 앱북은 혼자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IT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앱개발 전문업체와 손잡고 책을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예비 작가들에 전자출판을 권한다. 종이책 출판사에 의존하지 않아도 작품을 독자들에 전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많은 작가들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그가 조금 과장해 자신을 '전자책 패러다임의 선구자'가 되고 싶다고 소개하는 까닭이다.

■디지털에서 재탄생한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동화

작가 '무적핑크(본명 변지민·23)'가 그린 웹툰 '실질객관동화' 중 '거울나라의 앨리스' 편은 거꾸로 그려졌다. 거울 나라인 만큼, 모든 글과 그림이 반전됐다. 거울로 비추지 않으면 대사를 읽기조차 힘들다.

이처럼 색다른 시도는 기존 종이 만화에선 찾아보기 힘든 파격이다. 때문에 '거울나라의 앨리스'엔 칭찬만큼 비판도 많았다. 독자가 만화를 보면서 굳이 거울까지 사용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냐는 것이다.

처음 웹툰을 연재하기로 했을 때,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렇지만 꼭 뜻대로 되진 못했죠. 전형적인 만화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독자들에 더 편안한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도 많이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실질객관동화를 인기 만화의 대열로 끌어올린 데는 변 작가의 실험정신이 큰 몫을 했다. 이 만화의 콘셉트가 기존 동화를 한 번 비틀어보자는 것인만큼, 전형적인 만화의 작법도 탈피하고 싶었다. 플래시 게임을 만화 안에 심어 독자가 방향키를 직접 조종해 보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실질객관동화로 유명 작가가 됐지만 그 스스로는 아직 인기를 체감하지 못한다고 했다. 웹툰마다 주렁주렁 달린 댓글도 잘 보지 않는다. 굳이 댓글을 읽으며 하나하나 답글을 달아야만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다. 대신 그는 만화를 그리는 내내 독자를 고민한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지만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하는 디자인 시안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웹툰에 훨씬 더 신중하게 돼요. 웹이 파급력이 크다보니, 허튼소리를 해선 안되죠. 사람들이 제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메시지를 알아듣는지 독자들을 계속 생각하게 되죠. 독자들과 소통하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변 씨가 보기에 웹툰은 아직 깎지 않은 '원석'이자 마치 연극같은 순간의 예술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재 그 자체를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할 수 있지만 평가는 자신의 몫이 아니다. 이 원석이 옥이 될지, 그저 그런 돌덩어리에 불과할지는 독자가 판단한다는 생각이다.

출판만화는 확실히 '옥'이 될만한 원석만 써요. 그런데 웹툰은 달라요. 옥이든 아니든 일단 원석을 깎아 던져 놓으면 독자들이 이건 화강암, 이건 대리석 이렇게 평가하죠. 때문에 출판만화와 웹툰은 그 성격이 많이 달라요. 웹툰을 그리면 제 하드디스크에 저장 되긴 하지만, 제 것은 아니에요. 굳이 밥으로 따지자면 도시락이 아닌 급식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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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핑크란 필명을 세상에 알린 변 작가의 웹툰 '실질객관동화'는 곧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대학 4학년인 그가 지난 3년, 그러니까 대학 시절을 오롯이 바친 첫 작품이다. 그는 3년간 일주일에 한편씩, 단 한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는 '개근' 작가다.

할만큼 했다. 그가 실질객관동화를 마무리 하며 내놓는 한 마디다. 그는 자신의 웹툰을 설익은 작품이라고 겸손히 소개했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새로운 시도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디지털은 혁신과 도전이 언제든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