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클-HP, 세기의 이혼소송 막 오른다

일반입력 :2012/06/01 11:16    수정: 2012/06/02 09:00

오라클과 HP의 결별을 위한 IT업계 세기의 이혼소송이 마침내 시작된다. 유닉스 서버사업을 두고 벌어진 두 회사의 파경은 담당 판사까지 화를 낼 정도로 극심한 여론전 양상을 보이며 격화된 상황이다.

31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오라클과 HP의 아이태니엄 CPU를 둘러싼 소송이 시작됐다. 작년 3월 인텔의 유닉스 CPU인 아이태니엄 차기모델부터 SW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오라클의 결정을 뒤집기 위해 HP가 제기한 소송이다.

이 소송은 HP와 오라클의 전, 현직 CEO의 증인 출석이 줄을 잇는다. 래리 엘리슨 오라클 CEO, HP의 전 CEO에서 오라클 사장으로 직함을 바꾼 마크 허드, HP CEO였다 작년 경질된 레오 아포테커 등도 증인으로 출석할 예정이다. 인텔의 폴 오텔리니 CEO 역시 출석한다. 맥 휘트먼 현 HP CEO는 사건 발생 후 합류해 증인에서 제외됐다.

법원은 HP와 오라클이 아이태니엄에 대한 협력 계약을 체결했는지 여부를 따지게 된다. 협약의 법적 구속력을 법원이 인정하면 오라클은 아이태니엄 SW개발을 지속해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급법원까지 이어지며 소송이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다.

■불화 폭발에서 여론전까지, 급기야 판사도 '울컥'

오라클은 인텔이 아이태니엄 CPU를 단종할 계획을 갖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SW개발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인텔 아이태니엄 CPU는 인티그리티, 슈퍼돔2 등 HP의 유닉스 서버에 사용된다. 이는 HP 유닉스 사업을 쓰러뜨리기 위한 오라클의 전략으로 이해됐다.

HP는 오라클이 하드웨어 사업을 띄우기 위해 전세계 14만 고객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행위라며 반발했다. 이어 6월엔 오라클과 HP 간 맺은 아이태니엄 SW지원 협력에 대한 약속을 깨뜨렸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HP는 오라클이 아이태니엄 SW지원을 유지하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는 점을 공격하고 있다.

공격의 근거는 마크 허드 전 HP CEO의 이직 당시 맺어진 합의문이다. HP는 2009년 마크 허드가 CEO서 해임된 직후 경쟁사인 오라클 사장으로 이직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오라클과 HP는 협상을 벌여 ‘마크 허드 합의’라 불리는 문서를 만들었다고 HP는 주장하고 있다.

이 합의는 “마크 허드의 이직 후에도 HP와 오라클은 시스템과 SW사업 협력을 지속하며, 오라클은 HP 유닉스에 대한 SW개발을 지속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오라클은 아이태니엄에 대한 인텔의 중단의사를 마크 허드 합의 당시 HP가 이미 알고 있었다고 공격했다. 오라클과 고객을 속였다는 주장이다. 또한, 마크 허드 이직에 대한 합의가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맞받았다.

두 회사는 치열한 장외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HP 고객사들은 오라클의 조치를 비난하며 중단을 요구했다. 인텔은 아이태니엄 CPU 단종계획이 없으며, 오라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HP를 거들었다.

오라클은 이후 인텔의 아이태니엄 단종 계획을 접한 HP가 인텔에 8억8천만달러를 건내는 조건으로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주장했다. 인텔과 HP 사이에 체결된 밀약 문서도 공개했다. 최근엔 HP의 내부 임원 들이 주고받은 이메일과 보고서 등을 통해 인텔의 아이태니엄 단종을 HP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를 고객들에게 숨겨왔다고 강조했다.

HP도 맞불을 놨다. 오라클 임원들이 HP 죽이기를 조직적으로 준비했다는 증거를 공개한 것이다. 최근에는 오라클의 하드웨어 사업 담당 임원들이 썬의 하드웨어를 절름발이 개로 표현하는 인스턴트메시지(IMS) 내용도 공개했다.

두 회사의 여론전이 격화되자 심리를 맡은 제임스 클라인버그 판사가 불쾌함을 드러냈다. 클라인버그 판사는 두 회사의 다툼을 ‘이혼’이라고 비유하면서 “가정 법원에 두 회사를 보낼 수 없는 게 애석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상의 커플이 파국을 맞은 이유 '감정싸움+사업전략'

HP와 오라클은 2009년까지 환상의 커플이었다. 2000년대초 오라클과 HP는 IBM의 메인프레임을 무너뜨리기 위해 손을 잡았다. HP는 M&A로 확보한 ‘디지탈’의 고가용성 기술을 오라클에 건내 오라클DB의 성능을 대폭 향상시켜주기도 했다.

두 회사의 파경은 2009년 4월부터 조짐을 보였다. 오라클이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인수를 발표한 것이다. SW회사였던 오라클이 경영악화로 위태롭던 썬을 인수해 하드웨어까지 손에 넣은 사건으로, HP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오라클의 썬 인수 후 잠잠하던 두 회사의 불화는 마크 허드 전 HP CEO가 경질되면서 심해졌다. HP 이사회는 마크 허드를 성추문과 기업정보 유출로 해임했는데,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은 곧장 마크 허드를 자기 회사의 사장에 앉혀버렸다. HP는 SAP CEO였던 레오 아포테커를 신임 CEO에 임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레오 아포테커와 SAP는 래리 엘리슨과 오라클이 드러내놓고 싫어하는 인물이며 경쟁사다.

마크 허드는 오라클의 하드웨어 사업을 맡게 됐다. HP는 마크 허드의 영업비밀 유출 가능성을 제기하며 법정 소송으로 맞섰다. 소송은 HP와 오라클이 상호간 합의로 종결됐다.

오라클이 HP 등에 꽂은 칼은 극명한 효과를 내고 있다. 작년 오라클의 조치에 즈음해 극적으로 HP의 유닉스 매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인 올해 1분기 HP의 유닉스 매출은 급기야 4억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이는 전년 동기보다 30%가량 줄어든 것이며 5분기 전인 2010년 4분기 매출의 절반 수준이다.

전세계 유닉스 서버 매출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가트너와 IDC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서버시장은 판매대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매출이 하락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IDC의 쿠바 스톨라르스키 연구원은 “아이태니엄의 미래에 대한 자각이 최근 부각되면서 유닉스에 대한 고객 수요가 하락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HP 유닉스를 죽이기 위한 오라클의 칼날은 IBM을 향한다. 오라클은 최근 출시하는 SW 신버전에서 지원 플랫폼 중 IBM의 유닉스OS인 AIX를 제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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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시도는 IBM과 HP란 유닉스 양강구도를 붕괴시키려는 목적이다. 시장을 흔들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전반적인 유닉스 시장 규모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남은 시장을 차지하려는 오라클의 행보는 더 독한 모습을 보인다.

오라클과 HP의 싸움은 IBM과 오라클 간 최후 전쟁을 위한 전초전에 해당한다. 소송 결과에 따라 오라클이 IBM에게 휘두를 칼날이 무뎌질 수도, 더 날카로워질 수도 있다. 두 IT거인들의 이혼소송이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