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언제부터인가 화두가 됐다. 이화여대 최재천교수는 지식의 대통합을 의미하는 ‘통섭’이라는 품격 있는 용어를 유행시켰다. 통섭이든 소통이든 하나의 개별체계가 한정된 울타리를 넘어, 다른 계와 통해 지식을 교류하고 통합하는 일은 지식 증가의 시너지를 만드는 일이다.
통한다는 생각은 사실 자연적 현상이다. 동식물은 몸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조직의 경계를 가지고 있지만, 외부로부터 에너지원과 대사에 필요한 물질을 받아들이고 밖으로 신진대사의 결과물을 내보내며 통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생명활동의 속성이며 필수조건이다. 생명체의 속성이 이러함에도 사람의 정신 세계는 대개 안과 밖의 분리를 통하여 자신을 보호해 왔다. 신학과 과학이 그래왔고 교회와 정치, 서양과 동양, 신세대와 구세대, 보수당과 진보당과 같은 대립적이고 이분법적 사고의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통하는 일은 위험을 동반하기 십상이고, 잘못 통하면 기존세력에 의하여 거세당하는 위험에 빠진다. 이 때문에 통하는 일은 민감한 기교와 감성을 필요로 했다. 현명한 혁신자들이 발전시킨 이러한 테크닉은 미학으로 발전한다. 대개 사회가 여러 계층으로 나뉘어진 경우와 사회를 움직이는 문화가 배타적이고 획일적인 곳에서 이런 미학은 더욱 발전하는 것 같다. 일례로 박해를 피해 로마 카타콤바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초대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은 물고기 그림으로 서로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은밀히 확인하기도 했다.
작고한 일본 LAC의 미시바 회장의 교토 집에 몇 일간 묵은 적이 있다. 2층 양옥집의 1층은 일본식 다다미를 깔고, 중앙에 다다미를 걷어내고 바닥에 화로를 설치한 전통 난방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그 옆에는 나이테로 미루어 수백 년은 됨직한 길이 2m, 너비 1m가 넘는 육중한 좌식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미시바 회장은 나무 탁자에 사기잔을 둔탁하게 내려치면서 나무로부터 울리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소리로써 나무테이블의 격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무테이블 하나로도 민감한 메시지를 대신 전하였던 사례를 들려 주었다.
일본재계의 원로 A회장이 사업파트너인 B회장의 자택에 초대받아 만찬을 같이했다. 그날 A회장은 자사의 제안 사항에 대하여 B회장에게 화답을 듣고자 하는 자리였다. A회장의 수행비서 C도 배석한 그 자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하였다. 만찬을 마치고 A회장은 B회장에게 깊숙이 절하며 B회장의 저택을 떠나왔다. C는 이상했다. A회장이 B회장에게 제안에 대한 답변을 묻지도 않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단지 A회장의 얼굴 표정이 어둡고 무거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C가 A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어째서 제안에 대한 답변을 구하지 않으셨는지요?” A회장이 뒤따르는 C를 돌아보며 외쳤다. “빠가야로! 자네는 B회장이 내게 답변한 것도 눈치채지 못했나?” C는 A회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찬 중에는 제안에 대한 어떤 코멘트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B회장이 A회장에게 나무테이블을 가리키며 “제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라고 말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정도였다. A회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외쳤다. “나를 테이블 북쪽에 앉혔지 않았나?” C는 A회장이 테이블의 북쪽에 앉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북쪽에 앉은 것이 뭐가 대단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수백 년이 된 나무의 나이테는 남쪽과 북쪽의 모양이 매우 다르다. 남쪽은 햇볕을 풍성하게 받은 덕택에 나이테의 폭도 넓고 무늬도 가지런하게 나있는 반면, 북쪽의 나무 조직은 조금이라도 해를 보려고 몸부림을 치다 보니 나이테가 휘어져 뒤 틀려져 있고 폭도 좁다. 무늬만 보아도 나무의 남쪽과 북쪽을 알아 볼 수 있다. 목수가 그 나무를 베어내어 테이블을 만들면 나이테로 남쪽 편과 북쪽 편을 확연히 알아 볼 수 있다. 주인이 이런 테이블에 손님을 앉힐 때는 대개 남쪽 나이테 방향에 앉도록 하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저녁만찬에 B회장은 A회장이 오기 전에 테이블을 돌려 놓고 북쪽 나이테 쪽에 손님을 앉혔다. A회장의 제안에 대한 B회장의 답변은 이미 손님을 앉힐 때 전달된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직설적이고도 거북한 말로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은연중에 메시지를 전하는 고수들의 이 같은 의사소통의 문화를 미숙한 수행원이 눈치 챌 리가 없는 것이었다.
일본의 이러한 의사소통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서구 기업인들의 해프닝들은 여러 가지로 회자되고 있다. 이 때문에 다른 나라의 시장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이 그 나라의 소통 문화를 깊숙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낭패를 당할 확률이 높아질 것은 자명하다. 다른 사회체제와 교류할 요구가 있다면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상대에 대한 문화적 본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도전이다. 무엇보다는 마음이 오픈돼 있어야 한다.
몇 주전 직원 워크숍으로 지리산 쌍계사 계곡 초입에 있는 다우찻집을 찾았다. 법정스님도 드나들던 이곳 찻집은 ‘다우제다’라는 차 생산회사를 경영하시는 이승관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차에 대한 강연을 듣고 나오는 내게 건넨 발효황차의 브랜드명은 오픈마인드를 의미하는 개심(開心)이었다. 그 차를 저녁마다 마시면서 마음을 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곤 한다. 오픈돼 있지 않으면 소통할 수 없다.
2월말에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열린 MWC(Mobile World Congress)에 회사 직원과 함께 관람했다. 이곳에서는 업체가 얼마나 세상에 오픈돼 있는지를 벤치마킹할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 구글의 전시장은 그야말로 놀이터와 같은 플레이그라운드이다. 희한한 것은 그 바로 옆의 노키아지멘스의 전시장이었다. 그들은 사전에 예약한 사람만이 전시장에 입장하도록 했고 모르고 입장하려는 관람객을 경비원이 눈쌀을 찌푸리며 막아 섰다. 그렇게 하려면 왜 퍼블릭 전시장에 참여했는지 모르겠다.
더욱 가관인 곳은 즉석카메라제조사였던 미국 P회사의 부스였다. 최근 어려운 경영환경에 처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들은 휴대폰과 패드를 전시했는데 이상하게도 안에는 관람객이 하나도 없었다. 험악하게 생긴 남자 직원 한 명이 우리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부스를 사진 찍으려 했다. 근접촬영도 아니고 그냥 부스 전체를 담는 앵글이었는데도, 남자직원은 신경질적으로 “NO PICTURE”를 외쳤다. 내가 “It’s a public exhibition” 하며 무시하려 하자 마치 한대 칠 것처럼 인상을 쓰는 바람에 무서워서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왔다. 고객의 부정적 예단 속에 회사의 미래는 결정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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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폐쇄된 문화는 우리 주위에 아주 많이 있다. 자사 브랜드가 아니면 방문자에게도 주차를 허용하지 않는 자동차 제조사의 주차장, 애사심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사 제품만을 사도록 강권하는 전자제품회사, 지나치게 까다로운 보안심사로 통과만 수십 분이 걸리는 회사, 직원에게 시간을 내어 주지 않는 경영진, 협력사를 하인 부리듯이 하는 발주사 등.
이러한 회사 문화는 외부와의 소통 효율을 떨어뜨리게 만들고 시장과 경쟁사의 움직임에 둔감해지게 한다. 결국 그들에게 돌아오는 일은 고객의 외면일 뿐이다. 코닥과 소니가 부도라는 단어와 함께 어울릴 지 누가 알았는가? 모든 일은 소통의 문화에서 시작되고 소통의 문화로 귀결된 일이다. 開心 만이 살길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