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1억원의 예산을 들여 소비자 민사 소송을 지원한다. 대기업의 담합이나 제품 불량으로 피해를 입었던 소비자 소송을 정부가 지원하는 첫 사례다.
공정위는 녹색소비자연대전국연합회(녹소연)가 진행 중인 소비자손해배상소송의 피해자 모집 경비를 지원한다고 24일 밝혔다. 녹소연은 세탁기와 평판TV, 노트북 등 주요 전자제품 가격을 최대 20만원까지 올리기로 담합한 삼성전자와 LG전자를 상대로 소비자 민사 소송단을 내달 29일까지 모집한다.
공정위는 확보한 1억원의 예산을 소송인단 모집 광고비에 할애할 계획이다. 같은 피해를 입은 소비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신문이나 인터넷에 광고를 낼 때 드는 경비를 지원하겠다는 것.
녹소연은 공정위에 총 4천만원의 지원금을 신청한 상태다. 이 중에는 모집 광고비를 포함해 변호사 선임비, 감정평가비 등이 포함됐다. 공정위는 소송 비용을 검토한 후 지원액수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물먹은 소비자들, 억울해도...
공정위가 소비자손해배상 소송인단 모집 광고비를 지원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그간 기업의 담합을 적발해도 과징금이 전액 국고 환수돼 실질적으로 소비자가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을 감안한 것이다.
국내법상 소비자들이 대기업에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길은 개별 민사소송 밖에 없다. 증권 분야를 제외한 기업 담합 행위에 대해선 소비자들이 집단소송이 아닌 단체소송을 청구해야 하기 때문. 단체소송 판결 효력은 해당 제품의 판매 금지나 불공정 약관 시정에 머무른다.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소비자들이 민사 소송을 직접 청구해야만 한다.
이주홍 녹소연 국장은 민사 소송의 경우 소비자들이 1심에서 이겨도 기업들이 항소해 3심까지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재판 기간이 3~5년으로 길고 배상액수도 적어 이기든 지든 소비자들이 심리적으로 지치게 된다고 말했다.
서류 접수부터 변호사 선임, 감정 평가 등 소송에 드는 비용을 소비자들이 모두 지불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특히 기업에 입은 피해를 소비자 스스로가 입증해야 하는 감정평가비는 최소 1천만원 이상이다. 보통 민사 소송에서 소비자가 승리할 경우 받는 보상금이 몇십만원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선뜻 소송에 나서기 어렵다.
때문에 공정위의 소비자 피해 소송 지원 결정은 상징적인 의미로 평가 받는다. 정부가 소비자 피해 구제에 어느정도 직접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되서다.
그러나 실질 소송비용에 비하면 공정위 지원금은 매우 적다. 녹소연에 따르면 지난해 담합 적발은 약 80여건. 예컨대 담합이 적발될 때마다 모두 소송을 한다면 산술적으로 한 건당 지원금은 125만원이다. 보통 소송인단 모집 광고에만 1천만원 이상 든다는 걸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액수다.
때문에 관련 단체에서는 국내서도 1인 대표 소송이나 집단소송이 조속히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경우 제품 불량이나 기업 담합으로 입은 피해를 소비자 개인이 소송해 이길 경우, 같은 사례의 모든 소비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다. 집단 소송 역시 단체소송과 유사하지만 금전적인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주홍 녹색소비자연대 사무국장은 국내서는 기업들이 담합으로 걸리더라도 실질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적어 소송을 크게 무서워 하지 않는다면서 소비자들이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법안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자발적 신고 ‘리니언시’ 담합 적발은 늘었지만...
업계는 소비자 피해 구제와 별도로, 기업이 담합하다 걸렸을 경우 처벌이 솜방망이라는 지적도 한다. 국내 기업들이 가격 담합을 하다 걸렸을 경우 과징금은 해당 기간 관련 제품 매출의 10% 내외. 그러나 실질적으로 부과되는 과징금은 2~3% 안팎이다.
여기에 '먼저 자수하는 기업'에 과징금을 100% 면제해주는 리니언시 제도가 도입되면서 담합으로 걸리더라도 기업으로선 손해보는 것이 없게 됐다.
예컨데 지난 12일 삼성과 LG가 공정위로부터 맞은 과징금은 총 446억4천700만원. 이 중 먼저 담합을 신고한 LG전자의 경우 과징금 188억3천300만원을 전액 면제 받는다. 두번째로 담합을 신고한 삼성전자의 경우 50%를 감면, 129억700만원만 납부하면 된다.
정부는 지난 2006년 기업들의 담합을 막고 자발적인 신고를 유도하기 위해 리니언시 제도를 도입했다. 실제로 2006년 이전 연간 15~20건에 불과했던 담합 적발이 리니언시 도입 이후 지난해 80건까지 늘었다. 그러나 외국과는 달리 과징금 요율이 적게 매겨지고, 추후 감면폭이 커지면서 오히려 기업들이 리니언시를 담합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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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소비자 단체들에선 정부가 리니언시 제도를 보다 엄격히 적용하고, 담합이 적발될 경우 직접 피해를 입은 소비자 구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 국장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과징금 부과위원회가 결성되어야 한다면서 또 공정위가 걷은 과징금을 소비자들에 환원해 줄 수 있는 체계 마련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