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꼬부부 HP-오라클 파경 막전막후

일반입력 :2011/06/16 09:54    수정: 2011/06/16 10:25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며 IT시장을 호령했던 HP와 오라클의 사이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인텔의 유닉스서버용 프로세서인 아이태니엄을 둘러싼 HP와 오라클의 갈등이 법정 싸움으로 확대됐다.

HP는 15일(현지시간) 오라클이 인텔 아이태니엄 프로세서의 차세대 버전부터 SW개발을 중단키로 한 결정에 대해 캘리포니아 고등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오라클에 대한 HP의 법정소송은 이미 예고된 바다. HP는 지난주 '디스커버2011' 행사에서 오라클측에 아이태니엄에 대한 결정을 철회하지 않으면 법정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서신을 발송했다고 발표했었다. 오라클이 일주일동안 어떤 대응도 하지 않으면서 결국 고소로 이어졌다.

빌 월 HP 대변인은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지난주 이래 침묵은 점점 시끄러워져 왔다라고 밝혔다. HP는 고소장에서 “오라클이 HP의 유닉스 서버 사용자에게 오라클 하드웨어로 교체하라고 협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환상의 커플 '썬과 마크 허드' 때문에…

HP와 오라클은 2009년까지 환상의 커플이었다. 오라클이 새로운 DB 제품을 출시하면 때에 맞춰 HP가 그를 지원하는 하드웨어를 만들어줬다. 오라클의 최대행사인 ‘오픈월드’에서 HP는 항상 하드웨어에 대한 핵심 발표자였다.

2009년 4월. 오라클은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인수를 발표했다. SW회사였던 오라클이 경영악화로 위태롭던 썬을 인수해 하드웨어까지 손에 넣은 사건이었다. 당연히 절친이던 HP와 관계가 악화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

그러나 썬 인수선언 후에도 오라클과 HP의 관계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오라클의 썬 통합작업이 지체되면서, HP와 IBM이 썬의 고객을 빼앗아갔지만 오라클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두 회사의 감정싸움은 마크 허드 전 HP CEO가 성추문으로 물러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HP 이사회는 마크 허드 사임에 대해 성추문에 따른 것이라 밝혔지만, 이후 마크 허드의 기업정보 유출 의혹이 불거지며 단순한 성추문사건이 아니란 것을 드러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은 마크 허드가 CEO직에서 물러난 직후 그를 오라클 사장에 앉혀버렸다. 래리 엘리슨 회장은 “HP 이사회의 마크 허드 해임 결정은 애플 이사회가 스티브 잡스를 몰아낸 이후 최악의 결정”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HP는 이에 대해 마크 허드의 영업비밀 유출 가능성을 제기하며 법정 소송으로 맞섰다. 여기에 래리 엘리슨의 숙적으로서 SAP의 사장이었던 레오 아포테커를 신임 CEO로 앉혔다. 수년간 SAP의 ERP에 힘겨워했던 래리 엘리슨의 심기를 건드렸을 게 분명한 결정이었다.

■SW 앞세운 목조르기에 무기력한 HP

오라클로 자리를 옮긴 마크 허드는 썬 하드웨어 사업을 맡았다. HP의 서버 시장점유율 뺏기에 하드웨어기업 HP의 출신이 SW를 등에 업고 나선 형국이다.

오라클은 썬의 하드웨어와 운영체제(OS), 가상화, 애플리케이션 등을 결합한 어플라이언스 제품인 ‘엑사데이터’를 업그레이드하며 토털 솔루션 전략을 강화했다. 엑사데이터 X2 출시당시 오라클은 하드웨어와 SW를 최적화해 메인프레임급 성능을 자랑하는 진정한 클라우드머신이라는 미사여구를 덧붙였다.

하드웨어 판매에 치중하면서, 애플리케이션과 SW확보는 파트너에게 맡겨온 HP를 겨냥한 전략이었다.

오라클의 공격은 제품전략으로 끝나지 않았다. SW파워를 앞세워 HP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지난 3월 오라클은 인텔의 유닉스칩인 아이태니엄 차세대 모델부터 SW개발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래리 엘리슨 회장은 인텔이 x86서버인 제온에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아이태니엄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인텔 아이태니엄 프로세서는 유닉스 서버용 CPU로, HP의 유닉스 서버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IBM, 오라클 등이 파워7, 스팍 등 자체적인 유닉스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것과 달리, HP는 유닉스 서버 CPU를 인텔에 의존한다.

오라클이 아이태니엄 SW개발을 중단하면, HP 유닉스 사용자는 새로운 버전의 오라클 SW를 이용할 수 없다. 각종 프로젝트에서 ‘하드웨어는 HP, SW는 오라클’의 형태로 혈맹처럼 보였던 두 회사가 마침내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셈이다. 결정타였다.

오라클은 자신들의 결정을 대세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레드햇이 이미 아이태니엄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는 HP 유닉스를 도와줄 우군이 이제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다.

이후 HP는 오라클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데이비드 도나텔리 HP 부회장은 “썬 하드웨어 판매를 높이기 위해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고객비용을 늘리는 조치”라며 “공정한 경쟁을 제한하기 위한 염치없는 행동의 시작에 충격을 받았다”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오라클의 결정에 대해 HP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비난 외에 거의 없어보였다. 그저 오라클에게 결정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수시로 고객들의 목소리를 전하면서 답답함과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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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웨어의 호황 속에서도 SW파워 부재에 따른 무기력함을 절감했을 터. 레오 아포테커 HP CEO는 부임 후 SW사업을 강화할 뜻을 분명히 했다. 퍼블릭, 프라이빗,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서비스를 중심으로 개방형 SW마켓을 열고, SW기업을 인수합병(M&A)할 뜻도 공언했다.

한국HP의 한 고위임원은 최근 “오라클과 HP의 싸움은 향후 1년 내 결판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드웨어와 SW를 함께 쥔 오라클과, 강력한 하드웨어에 부족한 SW를 메우기 시작한 HP의 대결. 법정 공방은 상징과 행동에 불과하다. 결과는 사업실적에서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