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누가 케이블TV를 벼랑끝으로 몰았나?

기자수첩입력 :2010/09/14 10:37

비장하다. 이번은 밀릴 수 없다는 결연함마저 보인다. 지상파 방송 송출 중단을 불사하겠다는 초강수까지, 배수진을 친 군대마냥 독기로 가득하다. 케이블TV업계의 현재 분위기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산하 SO협의회는 13일 93개 회원사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총회를 열고 지상파 방송 송출 중단을 결의했다.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디지털케이블TV의 지상파 3사 재송신 중단을 명령한 후 첫 공식대응이다.

비상대책위원회도 꾸려졌다. 강대관 HCN 대표를 비롯해 변동식 CJ헬로비전 대표, 오규석 씨앤앰 대표, 이상윤 티브로드 대표 등 MSO 대표들이 모두 참여했다.

SO업계의 한 임원은 “그동안 케이블TV는 동일채널번호 부여, 지상파 방송사의 요구사항들을 모두 수용해왔다”라며 “케이블TV 사활을 걸고 지상파 유료화를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협상', '항소'에 대한 단어는 언급조차 없다. 지상파 방송사 측에서 요구하는 협상 테이블 마련조차 불투명해 보인다.

이들은 지상파 방송사를 공·민영으로 구분하고, 의무재송신과 저작권 조항을 손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상파 방송사가 지금껏 면제받아온 주파수 사용료를 내야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모두 법 자체를 바꿔야 할 내용이다. 업계 갈등을 넘어 관련법부터 재구성하자는 강도 높은 주장이다. 

직접적인 공격대상은 반대편의 지상파 방송사다. 하지만 케이블TV업계를 이토록 화나게 한 존재는 따로 있다. 첫째는 한국의 방송산업 전반을 책임지는 방송통신위원회다. 다음은 방송사와 정부기관을 규제하는 방송법이다.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TV의 재송신 갈등은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다. 지난 2008년부터 관련 논의가 시작된 이래 지상파와 케이블TV는 입장차만 반복해왔다. 급기야 법정 소송까지 넘어갔다.

그동안 방통위가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보면 당혹스럽다. 업계에서 수차례 방통위 중재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진 바 없다. 방통위 측은 항변한다. 관련법상 재송신은 당사자 협상사안이기 때문에 나설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다.

화살은 이제 방송법으로 향한다. 방송법 76조는 지상파 방송의 보편적 시청권을 규정하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에 공적 책무를 부과한 조항이다.

다만, 보편적 시청권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은 명시하지 않았다. 안테나를 이용한 지상파 직접수신이나 유료방송 재송신을 구분하지 않는다. 관련 조항은 시행령에도 없다.

이에 따르면 지상파 방송사는 전파를 내보내는 순간 그 보편적 시청권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다. 시청자가 방송을 볼 수 있는가는 고려대상이 아니다.

이 문제가 여실히 드러난 시점은 지상파 3사의 남아공 월드컵 중계권 갈등이 극에 달했던 지난 3월이다. 당시 KBS는 방통위에 SBS가 보편적 시청권을 위반했다며 제재를 요구했고, 덕분에 SBS의 방송도달범위가 공개됐다.

방통위에 따르면 SBS의 방송도달범위는 92%다. 단, 이는 유료방송을 포함했을 경우고, 유료방송을 제외하면 86%다. 지상파 직접수신만으로는 법령상 기준인 90%를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SBS는 이와 관련해 제재를 받지 않았다. 방송법이 직접수신과 유료방송 재송신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KBS나 MBC도 상황은 마찬가지란 것이 업계와 학계의 대체적인 공감대다.

만약 케이블TV가 지상파 방송 송출을 중단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케이블TV업계는 전국 70%이상의 시청자가 지상파를 볼 수 없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다음은 의무재송신과 관련한 부분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저작권과 저작인접권이 여기에 걸린다. 현행법은 유료방송의 지상파 의무재송신 대상을 KBS 1TV과 EBS채널로 한정한다. 당연히 두 채널의 콘텐츠는 저작권이 없다.

2000년 방송법 개정시 의무재송신과 저작권 조항이 수정됐다. 당시 MBC·SBS에 대한 언급을 넣지 않은 것이 케이블TV업계의 통한으로 남았다. 케이블TV업계는 이 기회에 정치적 힘을 보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동안 지상파 방송사와 방통위의 틈바구니서 당한 설움을 떨치겠다는 것이다.

지상파의 입장도 수긍못할 것은 아니다. 디지털시대의 흐름은 저작권을 인정하는 추세다. 지상파 방송사가 콘텐츠 대가를 받아야할 당위성은 시대 분위기에 있다. 플랫폼이 아닌 콘텐츠 제작과 유통이 산업의 핵심을 이루는 세상에서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하면 미디어 콘텐츠 사업은 시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추세 속에 관련법은 여전히 모호하다. 모호한 법규 아래 정부기관도 모호한 입장만 취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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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피해자는 한둘이 아니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모호한 법조항 속에서 콘텐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케이블TV 등 유료방송사업자들은 기준 없는 법규에 사업존폐를 걸어야 한다.

시청자는 무슨 죄인가. 1천500만 케이블TV 가입자가 졸지에 지상파 방송을 못 볼 위기에 처했다. 이중 57%는 지상파 방송이 나오질 않아 케이블TV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공은 방통위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