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차 공무원의 민간인 변신 스토리…설정선 통신사업자연합회 부회장

[김경묵의 인물탐구-5]설정선 통신사업자연합회 부회장

일반입력 :2010/02/15 16:42    수정: 2010/02/17 11:13

대담=김경묵 편집국장 정리=김태정기자

30여년의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민간인 신분으로 옷을 갈아입으면 웬지 어색하게 마련이다. 몸은 민간인이어도 마음은 당분간 공무원으로 남는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그만큼 어렵다.

방송통신위원회 정책실장을 거쳐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에 새 둥지를 튼 설정선 부회장이 딱 이런 케이스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만으로는 설 부회장의 변신을 제대로 담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신분만 바뀐게 아니라, 처한 입장도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통신 사업자들을 규제하던 공무원에서, 하루아침에 정부 규제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신문사를 옮기는 바람에 논조를 바꿔야할 언론인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만큼 첫 출근날 그는 달라진 분위기가 꽤 어색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맞물려 돌아가지 않았단다. 공무원 시절에 하던대로 아침 7시30분에 '칼출근'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습관은 역시 무서웠다.

변화에 따른 심적 부담도 적지 않았다. 처지가 달라지다보니 말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통신사업자연합회는 정부도, 회원사들도 '을'의 위치에서 대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을'보다는 '갑'에 가까운 공무원 문화와는 분위기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30년차 공무원 설정선 부회장은 이렇게 통신사업자 연합회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통신 환경 변화속에 새로운 역할을 찾다

설 부회장이 취임한 시기는 통신사들의 마케팅 경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해 여름이었다. KT의 합병 여파로 사상최고의 마케팅 비용이 지불됐고, 통신사의 수익률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장점유율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결국 승자가 없는 '제로섬 싸움'에 수조원의 돈을 퍼붓던 시기였다.

통신사 간 갈등은 깊어졌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케팅비를 줄이고 이를 창조적 투자로 돌리자'라는 통신사 CEO들의 다짐은 공염불이 됐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변화를 낯설어하던 설 부회장의 표정에도 조금씩 웃음이 번졌다. 할일이 생긴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통신 정책을 담당하던 기관에 있다가 통신사업자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에 왔다는 것이 부담도 됐지만, 산산업의 중심에 서서 사업자와 소비자간 이해관계를 조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해관계 조정은 정통부 공무원 시절, 그가 가진 주특기였다. 그런만큼, 업계를 이해하고 사람들을 만나야할 별도의 학습시간은 필요없었다.

그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우선 티격태격 다툼을 하고 있던 주요 통신사 대외협력 임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대부분 오랫동안 만나왔던 이들이었다. 설 부회장은 이들이 실컷 논쟁을 벌이도록 멍석을 깔아줬다. 치열한 논쟁속에 풀릴것 같지 았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장면이 연출됐다.

특정 업체를 편들지 않고 공평하게 접근하려는 자세를 유지했는데, 그러다보니 갈등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것 같더라고요.

연합회 업무가 익숙해지면서 그는 생활 패턴도 바꿨다. 우선 출근시간을 7시30분에서 8시로 늦췄다. 너무 일찍 나오면 직원들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느껴왔던 탓이다. 조금 늦게 나오는 대신 그는 아침에 운동을 시작했다. 민간인 설정선의 생활 패턴은 이렇게 조금씩 변해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는 신호였다.

통신사 입장과 정부 정책, 시장 상황 등에 걸쳐 그가 해야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았다. 현재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이슈는 통신요금.

수년 동안 그치지 않고 회자되던 통신요금 인하 논란은 지난해 통신사들이 초당과금제, 데이터요금 인하 등의 방안을 내놓으면서 차츰 가라앚는 분위기지만 확실한 후속조치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후유증을 없애기 위한 치료가 계속돼야 완치가 된다는 것이 설 부회장의 지론이다. 이에 맞는 치료법은 '통신요금 코리아인덱스'를 개발하는 것이다.

통신요금 논란은 명확한 지표와 기준이 있어야 종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요금비교에 대한 구체적 자료가 필요합니다. 현재 연합회는 방통위와 함께 코리아인덱스 개발 협의회를 구성해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통신요금비교 방법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논란인 이동전화 음성요금에 중점을 두고 비교기준과 방법론을 마련해 올 상반기까지 모두가 용납할 수 있는 요금수준 비교 지표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요금비교 방법론을 제시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설 부회장은 스스로의 역할을 통신사, 정부, 이용자 등 통신 산업과 관계된 각계 입장을 중재하고 조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소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에릭 슈미트 구글 최고경영자(CEO)를 예로 들었다.

컴퓨팅 분야에서 가장 큰 명성을 얻은 에릭 슈미트가 한 대학교 졸업연설에서 '지금 당장 컴퓨터를 꺼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기본적 경영마인드를 통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설 부회장 취임한 후 통신사업자연합회 위상은 이전보다 높아진 모습. 방통위는 물론 사업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많은 일을 추진할 역량을 갖췄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그는 연합회 역할을 좀더 확대하고 싶어한다. 분위기가 그럴만 하단다. 방통위 산하기관 축소에 따른 연합회의 역할성 강화 요구가 있는 시점이기도 하고, 통신서비스와 전통산업간 융합이 본격화됨에 따라 이들 기업을 서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 등 할일이 많아졌다. 정부가 아니라 업계 차원에서 뜻을 모으는 것도 중요해졌다. 설 부회장이 연합회 역할론을 외치는 이유다.

일이 많아지면서 그에 따른 리더십도 요구된다. 민간조직의 리더십은 정부 조직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 설 부회장은 솔선수범을 키워드로 꼽았다.

리더십의 핵심은 리더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부터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행동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할 때 직원들은 이에 맞춰 행동하게 됩니다. 윗자리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의 솔선수범을 통해서 강한 통솔력이 수반될 수 있습니다.

민간인 설정선이 느끼는 새로운 즐거움들

공무원 시절 그는 사람 좋기로 유명했다. 웬만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없었단다. 둥글둥글하게 생활하다보니, 친화력도 좋다는 평이다.

정보통신부가 해체된 뒤 1급 공무원으로는 처음으로 지식경제부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업무능력과 함께 그의 이런 스타일이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그는 2008년 3월 지경부 성장동력실장을 거쳐 그해 5월 곧바로 방통위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1급 공무원 신분으로 부처를 넘다들며 요직을 맡아 일한 경우는 관가에서는 결코 흔한 사례가 아니다. 설부회장의 캐릭터가 아니면 어림없을 일이라는 게 관가 지인들의 얘기다.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후배들도 많이 따랐던 편이다. 그가 지난해 방통위를 떠나기로 한 것도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용퇴의 결과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겐 외부에서 나오는 '사람좋다'는 평가들이 그리 좋게만 들리지는 않는 모양이다. 둥글둥글은 조금 비틀어보면 우유부단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고치고 싶은데, 잘안된단다.

그러나 둥글둥글 스타일은 조정자 역할과는 천생연분이다. 조정자가 너무 튀면 일은 망가질 수 밖에 없다. 조정자는 있는듯 없는 듯 보여야 한다. 설 부회장이 이를 모를리 없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계속 챙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공무원이나 동기 모임도 많지만, 동문회 모임과 IT분야 사장단 모임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스킨십을 이어가고 있다. 밉지 않은 가식들도 부리곤 한다. 그의 스마트폰에는 최신 곡들이 저장돼 있다. 요즘은 아이리스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가 18번이라고. 노래방에 가면 신곡 아니면 부르지 않는다.

젊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많이 얻습니다. 배울 점도 많고요. 그러다 보니 그들의 문화나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신곡 듣기나 스마트폰 사용을 통해 공통 관심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설 부회장의 꿈은 의사였다. 고등학교때까지만 해도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친한 친구 따라, 강남안가고 법대를 갔다. 지금 생각하면 의대 안간것을 가끔 후회도 되지만, 통신 시장의 아픈 곳을 치료한다는 생각을 하니 나름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공무원 시절 일에 파묻혀 지낸 그는 민간인으로 변신한뒤 가족들과 보내는 재미도 느끼게 됐다. 공무원일때는 주말도 없이 일했던 경우가 많은데, 지금은 예전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늘었다. 바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말은 가족과 보낼 수 있게 됐다.

“30년간의 공직을 그만두고 나니 집사람이 그렇게 좋아합니다. 짬을 내서 가족과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같이 하고… 이런 것이 사는 재미가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에 푹 빠져 지낼 수만은 없다. 민간인이 되어도 학습능력을 키운다는 마인드는 변한게 없다. 그는 현재 경영학 박사 학위에 도전중이다. 대학시절 전공을 살려 서울대 법대 최고지도자 과정도 밟고 있다.

틈틈히 책도 많이 읽는다.

공부벌레인 그가 요즘 즐겨 읽는 책은 리처드 H 탈러의 ‘넛지’와 게리 해멀의 ‘경영의 미래’다. 넛지는 ‘편견’으로 인해 반복되는 실수를 막고 현명한 선택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서라는 것이, 경영의 미래는 관습에 얽매이지 말고 ‘혁신’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에 예측하지 말고 창조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는 것에서 마음에 드는 책이라는 설명이다.

편견을 버리고 혁신하라

그가 추천하는 책을 통해 후배들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간결하다.

그는 이 두 가지 책을 추천했지만 정말 추천하고픈 책은 따로 있었던 것 같다.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냐는 질문과 대답 끝에 나온 책은 ‘청소부 밥’이었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가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삶의 행복과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읽어볼만 하단다.

한 분야에서 30년을 한결 같이 걸어온 그가 이제 연합회 부회장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지 6개월여가 지났다. 설 부회장은 이번이 자기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설명한다. 공무원에서 민간인으로, 규제 담당자에서 업계 이해 관계 대변자로의 변신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다. 요즘은 일을 좀 벌려야 겠다는 의지까지 갖게 됐다.

공무원 출신이 잘하겠느냐는 우려는 기우였다. 몇개월밖에 안지났는데, 통신사업자연합회 상근 부회장이라는 역할은 그에게 잘 어울려 보인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하다. 적응하지 못해 답답해 하는 모습은 엿보이지 않는다.

조금 빠른듯 싶지만,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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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민간 기업의 CEO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장차관 출신이 아니더라도 공무원 경험을 살려 민간 기업에서 전문 경영인으로 활약한다면 후배 공직자들에게도 나름 롤모델이 되지 않을까? 고시패스한 공무원들이 모두 장차관이 될 수는 없다. 장차관 말고도 할일이 많아야 공무원들도 여러가지 꿈을 꿀 수 있다.

그는 다음 목표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지금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게 있다. 구경꾼 입장에서 봤을때 그는 지금 다음 행보에 대해 나름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때가 되면 보여주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