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
“우리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비평하길 원했습니다. 1964년에 존재한 모든 것에 의문을 가졌지요. 이 운동은 심지어 반예술(anti-art)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지요.”
2000년 보이스오브아메리카(Voice of America,VOA)와의 인터뷰에서 이 세계적 예술가는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63년에 자신이 말한 반예술적이고 시대를 앞서 간 첫 번째 초현대적 퍼포먼스를 시도했었다. 그해 3월, 독일 서부의 작은 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 동양에서 건너온 무명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 제목은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으로 당시로선 다분히 이색적이었다. 전시장 입구에는 소머리가 내걸려 피 냄새가 진동했고 관객들은 현관입구에 걸린 공기를 70%만 채운 커다란 기상 관측용 풍선에 막혀 기다시피 들어가야 했다.
스승이자 동료인 전위예술가 요제프 보이스가 도끼를 들고 와 개막식에서 피아노 한 대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전시장에 있던 또다른 피아노에는 인형과 철조망, 브래지어, 전구 등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전시를 주최한 작가는 전시장 여기저기에 ‘텔레비전’을 흩뜨려 놓고 자석으로 화면을 왜곡시켜 변형된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인터넷 TV(IPTV)까지 등장한 최근에 들어서야 화면을 관객 마음대로 이그러뜨릴 수 있는 ’양방향성‘을 원형인 이 ‘자석TV'퍼포먼스의 의미가 읽힐 만큼 그의 업적은 선구적이었다. 양방향미디어의 구상은 11년 후 나오는 그의 저서에서 그림처럼 펼쳐진다.
■비디오아트로 현대미술의 혁명을 가져오다
이 전시회의 주인공은 당시 31살이었던 백남준이란 한국청년이었다. 요셉 보이스로부터 '역사적인 순간(historical moment)이라는 평을 받은 이 전시는 '미디어 아트'(비디오 아트)의 출발점이 됐다.
그를 변신시킨 것은 1960년대 등장한 플럭서스(Fluxus: to flow)운동이었다. 모든 장르의 예술을 통합시키려는 전위적 흐름이었다. 이는 백남준에게 매스미디어인 TV를 이용해 음악과 미술의 결혼을 주선하고 결합시키도록 이끌었다. 기존의 모든 관념과 철학 예술 등을 거부하는 그의 사상과도 맞아 떨어졌다.
TV는 모든 것을 담고 표출할 수 있는 무한대의 그릇이었다. `TV첼로(1964)‘,섹스트로니크(1967), TV브래지어(1969)에 이르기까지 그의 혁명적 예술은 이어졌다. 하지만 전세계가 그를 자신들의 사고의 그릇으로 담기엔 그의 사상이 너무 컸다.
1984년 1월 1일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서 전세계를 잇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전파를 타고 전세계의 안방으로 흘러 들었다. 그것은 조지 오웰의 `1984‘와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영상에는 역동적이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전세계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화면은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서로 감시하는 빅브러더가 아니라 위성동시 중계를 통해 이뤄진 TV비디오를 통해 전세계가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이벤트였다.
그것은 초현실적인 현실주의 예술이자 마술이었다. 비로소 그는 비디오아트(미디어아트)는 팝아트,신표현주의까지 캔버스에 갇힌 당대의 주도적 예술사조를 일거에 제압하며 세계 미술사에 우뚝섰다.
■앨고어의 NII와 백남준의 ‘전자슈퍼하이웨이’
전세계에 무료 월드와이드웹(WWW)이 공개되기 19년 전인 1974년. 록펠러 재단에 텍스트가 제출된다. ‘후기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플래닝-26년 남았다‘는 긴 제목의 글이었다.
이른바 ‘전자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라는 아이디어가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록펠러재단은 그에게 1만2천달러를 지불했고 책은 1976년 독일에서 발행됐다. 1994년 전자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란 이름의 영문판이 나온다. 놀라운 것은 그의 저술이 당시 미국 TV 및 통신시스템의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한 것은 물론 정보화의 미래를 너무도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글에서 ‘광대역통신망(BROADBAND COMMUNICATIONM NETWORK)'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경제발전에 중요한 인프라가 IT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물론 이를 국가 경쟁력 확보와 후기산업사회의 번영을 지속할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백남준은 “새로운 전자슈퍼하이웨이의 건설은 훨씬 더 큰 사업이 될 것이다. 우리가 뉴욕을 LA를 연계시킬 때 드는 돈은 달착륙선 발사 비용과 맞먹겠지만 부수효과는 훨씬 클 것”이라는 예견한다.
그의 아이디어는 클린턴 행정부의 앨 고어 부통령이 93년 9월 제안해 95년 1월31일 보고서로 구체화한 국가정보프라(National Information Infrastructure·NII) 비전의 기본 아이디어라 할 만큼 흡사한데다 구체적이기까지 했다.
백남준은 양방향TV를 통한 흑백갈등 해소를, 앨고어는 국가정보인프라를 통해 전세계가 이웃처럼 되는 커뮤니티를 각각 꿈꾸며 구상을 펼친다. 하지만 두사람 모두 정보네트워킹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실행 방안에서 너무나도 같았다.
그가 남긴 족적은 ‘정보고속도로’라는 컨셉트를 통해 예술분야를 넘어 IT정보화분야에까지 뚜렷이 남아 있다.
■상상과 상식을 초월한 선구적 예술세계
그의 장례식은 과연 세기가 낳은 전위예술가의 그것다왔다. 2006년 2월3일 오후 뉴욕 맨해튼 장례식장에서 조카 켄 하쿠다가 조문객들에게 제안을 했다. 넥타이를 잘라 백남준에게 헌정하자는 것이었다. “넥타이는 맬수도 있고 자를 수도 있다”는 그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먼저 가위를 든 사람은 비틀즈의 멤버인 존 레논의 부인이자 백남준을 요셉 보이스에게 소개시켜 준 오노 요코였다. 참석자들은 잘린 넥타이를 유해 위에 공손히 올렸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살다가 저승으로 떠난 그에게 바치는 마지막 오마주였다.
그것은 1960년 백남준과 그의 스승이자 동료가 된 전위예술가 케이지 간에 실제 있었던 일화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남근과 권위주의의 상징인 넥타이를 자른 이 퍼포먼스는 27살의 그가 다짜고짜 20년 넘는 대선배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데서 시작됐다. 그것은 전위예술가 백남준의 자기주의 선언이기도 했다.
그의 친구들은 자신의 몸의 일부와 다름없는 옷자락의 대신이라 할 넥타이를 통해 거인 백남준의 길동무가 되고 싶은 뜻을 함께 나눴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예술 유목민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삶을 마감했고 친구들은 그에게 장례식조차 퍼포먼스로 마감할 수 있게 해주었다.
현대예술의 혁명가, IT의 비저너리 백남준은 최근 한국의 글로벌화와 관련해 이슈가 되기도 했던 ‘비빔밥’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자신감을 주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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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지난 1994년 한 미술평론가와의 대담에서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2010년 1월29일 서울 봉은사에서 열린 백남준 4주기 추모제에서 조카 켄 하쿠다는 또다시 퍼포먼스를 고인에게 올렸다. 피아노위에 올려진 백남준의 영정 앞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