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발뒤꿈치냐, 온라인의 제왕이냐?
“난 자네 회사의 20%를 살 수 있지, 아니면 통째로 사 버릴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직접 이 사업에 뛰어들어 자네를 매장 시킬지도 몰라.”
IT제국의 황제는 자기가 초청한 소년티가 채 가시지 않은 둥글둥글한 얼굴의 한 사업가에게 무서운 말을 던지고 있었다.
1997년 5월11일 시애틀 근교. 신축된 자신의 첨단 IT 저택에 전세계 주요 IT사업가들을 불러들여 마련한 '테크놀로지서밋(Technology Summit)' 행사가 빌 게이츠의 저택에서 열리고 있었다.
2만평방피트 규모의 4천만달러짜리 첨단 신축저택에 초청받아 협박을 받은 이 사람은 미국 인터넷업계의 새 별로 떠오른 스티브 케이스 AOL회장이었다.
빌 게이츠의 이 욕심이 묻어나는 말은 AOL사업이 IT황제의 눈에도 장래성있는 유망한 사업으로 비쳤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었다.
1983년 퀀텀컴퓨터서비스로부터 시작해 14년째. 집중적 위기 관리가 회사의 문화로 정착된 회사는 이제 간신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야흐로 탐욕스런 MS의 입안으로 빨려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설립이래 최대 위기이자 어쩌면 최대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빌의 친구 폴 앨런도 한때 AOL 지분을 25%까지 확보하면서 이 회사를 욕심내지 않았던가.
그는 되뇌었다. “AOL은 세계를 제패하는 회사가 될 것이다.앞으로 우리서비스는 미국의 모든 집 부엌,침실,사무실,쇼핑센터를 뒤덮게 될 것이다.”
■14세 신랑과 73세 신부의 결혼
2000년 1월10일 월요일. 신년 벽두 뉴욕에서 들려온 뉴스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 IT,미디어 업계를 놀라움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국 최고의 인터넷서비스사업자(ISP) AOL의 스티브 케이스회장과 세계최고의 미디어재벌 타임워너의 제럴드 레빈 회장이 합병을 발표했다.
뉴밀레니엄 시작과 함께 예상된 전세계 컴퓨터시스템의 Y2K 컴퓨터오작동 우려를 진정시킨 지 열흘 만이었다.
CNN은 “AOL이 1820억달러 규모의 주식과 부채를 포함 1820억달러에 타임워너를 인수, 디지털미디어발전소로서 모든 미국인의 생활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세계 기업사상 최대의 합병이었다.
AOL의 제안은 월요일 시장가치로 1650억달러대로 평가받았다. 새해 첫주 금요일 증시거래 마감시 시가총액 830억달러의 두배나 됐다. 지난1999년 보다폰이 만네스만을 1486억달러에 인수한 것이 최고 기록이었다.
이 결합은 시가총액 3500억달러규모에 연간 매출 300억달러가 넘는 회사를 탄생시킬 것으로 전망됐다. 투자자들은 또 어디서 메가딜이 이어질지 촉각을 곤두세웠고 미디어 및 IT회사들의 주식이 상승탄력을 받았다.
이 세기의 결혼식에 대해 “10대인 신랑이 70대의 신부를 맞이한 격”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73년 역사의 타임워너가 14년차 AOL에게 인수된 것을 빗댄 말이었다.
■닷컴거품 붕괴 직격탄 속 합병
나는 이것을 역사적인 합병이라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환경을 바꾼 시간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케이스 AOL CEO겸 회장 두 회사간 합병 시너지효과에 대한 자신감을 이렇게 당당히 표현했다.
합병은 AOL 및 컴퓨서브를 통해 고속광대역 인터넷접속 서비스를 받는 2000만 가입자와 타임워너케이블의 1300만 가입자 간 결합을 뜻했다. 미국최고의 온라인서비스사업자의 위치는 공고해 보였다.
하지만 이 세계최대의 합병이 이뤄진 해는 '인터넷거품 붕괴의 해'이기도 했다. 주식은 곤두박질쳤다.
이듬해 1월11일 두 회사가 FCC의 합병승인을 발표했을 때 꼭 1년 전 1천650억달러 규모로 산정됐던 시장가치는 1천60억달러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주식 가치는 75% 이상 하락했다. 이듬 해인 2002년 말 영업 손실액은 1천억달러 가까이에 이르렀다.
게다가 FCC위원 5명이 만장일치로 승인한 합병조건은 AOL타임워너로 볼 때는 경쟁 케이블 회사에 대한 고속서비스 제공 등 6개의 규제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여기엔 AOL의 잘나가는 AOL인터넷메신저(AIM)와 ICQ를 MS,야후 AT&T 익사이트@홈 등과 호환되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기술발전 못따른 비즈니스 모델
합병으로 야기된 고통과 손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
세기의 합병 발표 10년 째인 2010년 1월 4일. 제리 레빈 전 타임워너 최고경영책임자(CEO)가 CNBC에 출연해 당시의 경영 판단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사실 그것은 무모한 합병이었다. 1990년대 말은 정상적인 시대가 아니었다. 수익이 타임워너의 20%에 불과한 AOL의 가치가 1천750억달러로 매겨졌다. 타임워너의 가치인 900억달러의 두 배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거의 동등한 합병에 합의했다.
일각에서 나오던 우려조차 미디어공룡 등장에 대한 기대감과 환호속에 묻혀버렸다. 전문가들은 인터넷과 오락산업 자체의 불확실성, 그리고 인터넷 부문보다 훨씬 성장속도가 떨어지는 기존 미디어 합병에 따른 수익률 하락을 제기하고 있었다.
2002년에만 무려 100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불과 3년 후, 2천억달러에 육박했던 주식가치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남은 시가총액은 750억달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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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전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비즈니스 모델이 화근이었다. AOL 회원 대다수가 전화접속(다이얼업모뎀)방식을 사용, 대용량 데이터의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타임워너케이블 고객의 초고속 인터넷 가입률은 4%에도 못 미쳤다. 야후,구글이 비집고 들어왔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돈먹는 하마가 됐다.
지난해 12월 10일 AOL은 마침내 동거를 청산했다. '사이버공간의 바퀴벌레''디지털드라큐라''온라인세계의 나자로'란 별명의 AOL은 또다시 벤처정신을 발휘해 사이버공간을 향한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