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찍어내는 공장' MIT미디어랩 한국인 이야기

여타 학문간의 교류, 즉 통섭이 혁신엔진이다

일반입력 :2009/08/13 19:02    수정: 2009/08/14 16:01

류준영 기자

기술 장벽이 많이 무너졌다. 그런만큼 차별화하기가 어려워졌다. 꺼낼 카드는 가격외엔 특별한게 없다. 소비자들의 기대를 맞추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해답은 창조성일 것이다.

창조성? 말은 쉽지만 실천은 장난이 아니다. 토목경제에서 널리 쓰이는 '하면된다'는 말은 먹혀들지 않는다. 통찰력에 기반한 상상력이 있어야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다.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은 고정관념을 깨는 발상으로 유명하다. 많은 혁신을 만들어낸 곳이다. 전자 종이, 모션 캡쳐, 웨어러블 컴퓨터, 100달러 노트북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천하의 MIT미어랩도 요즘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다. 기술에 진입장벽이 많이 낮아진 탓이다. 이를 위해 MIT미디어랩은 다른 학문간 교류, 이른바 '통섭'을 주목하고 있다. 통섭이 혁신의 엔진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런 가운데 MIT미디어랩이 최근 한국을 찾았다. 컨퍼런스는 물론 워크숍도 열었다. 핵심 주제는 통섭이었다.

MIT미디어랩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정재우씨는 이번 행사 내내 통섭의 잠재력을 알리는 전도사로 맹활약했다.

■상상력 한계를 벗어나는 방법

MIT미디어랩의 근래 내부 이슈는 '상상력의 한계'다. 이를 인정하는 내부의 목소리가 크다고 한다. ‘상상력의 천국’으로 불리는 MIT의 정체성에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원인은 허물어지는 기술 진입장벽. 정재우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술장벽이 갈수록 낮아지면서 MIT에서 하던 연구를 다른 연구소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어요. 차별화가 사라진 것이죠. 옛날엔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했는 데, 이젠 전혀 다른 분야를 볼 수 있는 관찰력이 더욱 더 요구되고 있습니다.”

학제간 연구를 첫날 컨퍼런스 토론 주제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것을 찾고, 정해진 관점을 바꾸기 위해선 이제부터 예술 공학 등의 기초 학문과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 기술을 접목시킨 이종 학문간 연구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엔지니어는 완벽주의자가 되기 보다는 왜 만들고, 무엇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면서 새로운 것을 흡수하는 자세와 전공분야뿐 아니라 전혀 보지 못했던 부분도 두루 살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제품 기능 하나가 잘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이는 엔지니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고, 그보단 이를 더 확대하거나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안겨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태도가 요구된다는 얘기였다.

정재우씨 얘기를 해보자.

뉴욕주립대학 시절, 그는 단지 로봇을 좋아하고, 미적분과 수학에 능통한, 단지 공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미래를 예측하고, 기술 패러다임을 바꾸며, 악으로 깡으로를 외치던 투지의 과학자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평범한 대학생활이 이어지던 대학교 4년. 그는 담당교수의 추천으로 MIT미디어랩에 들어가게 된다. MIT미디어랩 출신이었던 담당 교수는 여러 학생을 두고 오랜 고심하다 정재우씨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의 삶에 변화를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명문 하버드와 스탠포드대학에서 연구원으로써 꿈의 나래를 펼쳐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정재우씨. 그러나 MIT미디어랩에 들어간뒤 6년간 무관심의 그늘속에 놓이게 된다.

누구의 간섭도 없고, 다른 학교 석박사 과정처럼 빡빡한 커리큘럼이 없었다. 졸업까지 정재우씨에게 주어진 과제는 마음껏 상상하고 펼쳐보라였다. 그렇게 하이얀 종이가 주어졌고 빈공간을 채우면 졸업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정재우씨는 부족한 영어실력에 프리젠테이션 스크립트를 밤새도록 달달 외우고, 낯선 연구기관에 직접 찾아가 아무나 붙잡고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도 한국에와서 MIT미디어랩 행사를 여는 열정을 보였다. 대만 학생들이 모국에서 MIT미디어랩 행사를 여는 것을 보고 적잖이 자극을 받았단다.

정재우씨는 미국 대학 연구소내 모든 한인 학생들이 이번 행사에 전도사가 되어주길 주문했다. MIT미디어랩과 같은 연구기관에서 갈고닦은 실력을 한국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전파하자는 게 이번 행사의 궁극적인 취지다.

그를 만난 서울 종로구 동숭동 제로원 디자인센터 워크숍 행사장 안은 무척 분주했다. 실험용 기자재가 즉각즉각 운반됐고, 120명분의 점심식사로 햄버거와 콜라가 도착했다. 한끼 전체 식사만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사흘간 진행되는 이번 워크숍의 전체 예산은 대략 1억원에 가까웠다.

대화는 우연찮게도 일본 혼다가 만든 로봇 아시모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미래의 신성장 동력인 로봇 분야에서 반드시 일본을 넘어야 한다는 부담. 혹 이를 책임질 미래과학도들의 생각이 궁금했고, 그가 휴먼컴퓨터 인터렉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탓에 전공과도 무관치 않다는 판단이 섰다.

정재우씨는 두 발로 걷는 인공지능로봇에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될 때 그는 ‘왜 로봇이 걸어야 하나’라고 생각했단다.

“로봇이 걷는 것은 사람이 걸어나니니까 그런 것 인데, 이동의 효율성 측면에선 굳이 로봇이 걸어다닐 필요가 없죠. 이런 기술은 문화와 꿈, 상상에 초점을 맞춘 일본만의 특색을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정재우씨 입학시, 당대 MIT미디어랩 학생들의 관심은 온통 소니와 같은 일본회사에 쏠렸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일본 기업들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기업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정재우씨는 한국기업 연구원들의 열의와 적극성에 후한 점수를 매겼다.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삼성과 LG전자는 지금 MIT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업이에요. 교수님들도 자주 한국기업의 사례를 설명하시는 데, 참! 정말 이렇게 한국기업의 위상이 단시일내에 이정도로 바뀔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에요”

그러나 기뻐할 수만은 없다. 삼성과 LG전자 선호도는 높지만 MIT미디어랩 학생들이 취업하고픈 기업 축엔 들지 못한다. 돈을 아무리 많이 쥐어 준다고 해도 망설이게 된단다. 톱-다운 방식의 조직 문화 때문이다. 상사가 던져준 과제를 2~3년내 결과물로 만들다보면 일에 파묻혀살수 밖에 없다. 사생활은 없어진다.

그래서다. 정재우씨는 혁신을 위해서는 개인의 삶도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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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에선 롱텀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하다 보니 당장의 성과를 바라보고 연구에 임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해외 우수인력들을 유치하기 위해선 그들에게 끊임없는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개인의 삶도 존중해 줘야 해요. 설령 이곳에 누군가가 그렇게 산다면 기능적으론 유능할지 몰라도, 변수 없이 계획된 데로의 삶은 곧 상상력의 피폐를 불러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