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춘희의 IT 눈대목] 토론 없이 왕따만 있는 게시판

전문가 칼럼입력 :2004/06/02 00:00

유춘희 (컬럼니스트)

영어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외국에 나갔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한결같다. 그게 뭔고 하니, 어딜 가나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고, 한국 사람들하고만 몰려 다니다보니 영어는커녕 우리말 능력이 더 늘었다는 하소연이다. 한국에서보다 말문은 트였겠지만 한국서 맘먹고 공부하는 것 만한 효과는 내지 못했을 것이다.문화가 같고 똑같은 말을 쓰는 민족이 서로 어울린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 문제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일단 마음이 편하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돈 들여 거기까지 가서 꼭 우리끼리만 논다니 이해가 안 간다. 그러니 호주를 가든 필리핀을 가든, 영어 제대로 배우려면 한국 사람 없는 곳으로 가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반대파의 입을 막아버리는 자유게시판지금 인터넷에 다양한 토론 광장들이 있는데, 그 모습이 딱 ‘우리가 남이가?’ 꼴이다. 인터넷 게시판은 한국 특유의 끼리끼리 문화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짐작컨대 독자 여러분이 가장 자주 들어가는 웹사이트는, 아마도 독자의 정치 사회적 이념을 가장 잘 반영하는 사이트일 것이다. 솔직히 필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서 저쪽은 요새 무슨 이슈를 가지고 떠드는지 좀 보자, 하고 들어가는 정도다.사회적 정치적 논쟁이 뚜렷하게 갈리는, 예를 들어 진보와 보수 진영들이 운영하는 사이트를 보면 주제에 대한 해석이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니 같은 사안을 갖고 온라인 여론조사를 하면 어떤 매체가 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확 다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편집자나 기고가가 아니라 각자의 사이트에 자유롭게 글을 올리는 사람들 역시 사이트 입맛에 맞는 의견만 제시한다는 것이다. 아마 그 사이트의 열혈 팬만 들어오기 때문이리라.오프라인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의 독자란에 실리는 글들은 신문 논조와 닮았다. 그 신문의 독자가 일단 그런 성향일 테니 대부분의 기고들이 편집자의 입맛에 맞을 것이고, 간혹 돌출(?)기고가 들어온다 해도 신문이 지향하는 바에 맞지 않으니 제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러내기가 어려운 리얼타임 인터넷의 게시판 글들이 그 매체의 성향과 맞는 글들로만 채워져 있는 건 이상하고 서글픈 일이다.인터넷 게시판은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여 이해를 돕고, 해결점을 찾아보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어떤 사이트에서는 이 의견이 거의 100퍼센트, 저 사이트에서 저 의견이 거의 100퍼센트라면 그건 토론이 아니라, 일방 주입이다. 매체가 표방하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필진을 운영하는 건 당연하지만, 일반 독자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유게시판에서조차 반대파의 입을 막아버린다.당신들의 천국이 된 커뮤니티 사이트열린 보수를 표방하며 최근 창간한 한 언론은 “독자가 주인이 되어 만드는 인터넷 신문”이라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만나 합리적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다양한 토론 공간을 제공한다”고 사이트에 새겨두고 있다. 의제는 사이트 운영자가 내는 것이고, 토론은 보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지만, 그곳 역시 다른 부류의 사이트와 다르지 않다. 의견이 자신들과 심하게 다르면 삭제되는 수도 있다.그쪽 주류들과 생각이 조금 다른 의견을 (어쩌나 보자 하고) 나름대로는 논리 있게, 감정 상할 단어는 쓰지 않고 전개를 해도 ‘왕따’가 되어버린다. ‘어느 쪽 알바’니 하는 건 약과고, 아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되돌아온다. 상대가 없이 자기네들끼리 주고받는 얘기도 상소리를 해가면서 신이 나 있다. 결국 게시판은 반대자, 즉 다른 의견을 가진 적들에게는 틈을 주지 않고 그들만의 천국으로 만들어진다.그 사이트를 도배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같은 편 아닌가? 자기네들끼리 맞아! 옳아! 해봤자 스스로 위안만 될 뿐 무슨 득이 있을까. 자기들만이 노는 옳은 땅이니, 생각이 다른 사람은 얼씬도 말라는 얘기인데… 그럴 걸 왜 사이트를 만들었을까. 상대의 의견에 적절하게 논리로 공박하고 다시 그쪽에서 의견이 날아오고, 다시 날리고… 마지막엔 TV 토론처럼 시청자(게시판 방문자)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어차피 결론은 없다. 공박할 논리가 없이 욕설로 얼버무리면 패배한 것이다.공론의 장이 아니라 단순히(?) 세를 과시하기 위해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면 허울뿐인 게시판은 닫아도 좋다. 그렇다면 진보 사이트와 보수로 분류할 수 있는 사이트, 그리고 중도로 볼 수 있는 사이트가 각각 몇 곳인지 따져서 숫자로 우열을 가리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오프라인 모임으로 친목회를 만들면 그만이다.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통로라던 인터넷에 토론이 없다니…. 설령 있다 해도 토론은 싸움이 되고 계속했다가는 칼만 안 들었지 상대방을 죽일 태세다. 토론의 규칙은 아예 없어서, 논쟁을 하면 할수록 의제의 핵심은 수렁에 빠진다. 도대체 객관적인(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분석도 없고 독립된 시각은 인정하지 않는다. 정 그럴 생각이면 ‘인터넷 언론’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쓰지 말고, 당신들의 천국 ‘커뮤니티 사이트’임을 솔직히 밝히는 게 옳다. @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