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근의 헤디트] 문화자원은 많은데 왜 명소는 부족한가

도시는 시설이 아니라 장면으로 만들어진다

전문가 칼럼입력 :2026/06/08 10:15

이창근 헤리티지랩 디렉터

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산업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도시는 문화자원이 부족해서 기억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오래된 역사도 있고 지역만의 이야기와 풍경도 있으며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의 층위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막상 그 도시를 떠올리면 선명한 인상 하나가 쉽게 잡히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장소는 많지만 명소는 부족하고 문화자원은 풍부하지만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은 드물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도시의 과제는 자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자원이 기억될 장면으로 이어지지 못하는가에 있다.

민선 9기 출범기에도 이 질문은 여전히 중요하다. 새로운 지방정부는 무엇을 먼저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시민이 가장 먼저 체감하는 것은 구호보다 공간이다. 보고서보다 광장이고 선언보다 거리이며 약속보다 매일 걷는 길의 변화다. 원도심의 작은 광장 하나, 수변의 산책 동선 하나, 생활권 공공공간의 표정 하나가 새로운 행정의 방향을 생각보다 먼저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도시를 기억하게 만드는 첫 장면은 정책의 마지막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앞에 놓여야 할 질문에 가깝다. 오늘의 도시 경쟁력은 자원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어떤 장면으로 남길 것인가에서 갈린다.

이창근 헤리티지랩 소장·예술경영학박사(Ph.D.)

문화자원은 많은데 왜 기억은 남지 않는가

도시는 시설의 목록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은 도시를 장면으로 기억한다. 어떤 광장의 표정, 어떤 거리의 분위기, 어떤 수변의 흐름, 어떤 장소에서 잠시 머물렀던 감각을 통해 도시를 떠올린다. 결국 도시를 오래 남게 만드는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세웠는가보다 무엇을 어떤 인상으로 남겼는가에 더 가깝다.

많은 지역은 이미 충분한 자산을 갖고 있다.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무형유산이 있고 원도심의 시간과 골목의 표정이 있으며 강과 바다, 산과 들, 오래된 시장과 생활권의 풍경이 있다. 문제는 자원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자원이 시민과 방문객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모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문화자원은 흩어져 있고 이야기는 분절돼 있으며 공간은 각각 존재하지만 도시의 얼굴로 묶이지 않는다.

유산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명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시 찾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걷는 흐름과 머무는 감각, 바라보는 시선과 남겨지는 기억 속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살아날 때 비로소 도시의 자산이 된다. 그래서 도시를 바꾸는 일은 무언가를 하나 더 얹는 일보다, 이미 가진 자산을 어떻게 다시 읽고 어떤 공간의 표정으로 세울 것인가를 묻는 일에 가깝다.

여기서 명소는 거대한 관광시설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이 다시 걷고 싶어 하는 거리, 머물고 싶어 하는 광장과 공원, 밤에도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수변, 도시의 이야기를 품은 문화거점도 모두 오늘의 명소가 될 수 있다. 결국 도시의 경쟁력은 새로운 시설을 얼마나 더하느냐보다, 이미 가진 자산을 얼마나 선명한 장면으로 바꾸느냐에 있다.

구 송도역사 야외공간의 협궤철도 전차대. 과거의 철도 기억을 오늘의 공간 경험으로 다시 읽게 하는 장소다.

기억되는 도시는 경험의 흐름을 갖고 있다

우리는 종종 도시를 설명의 대상으로 다룬다. 역사라면 해설문을 붙이고 관광이라면 안내판을 세우며 공간이라면 시설을 보강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물론 그런 장치도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설명보다 먼저 도착하는 인상인 경우가 많다. 설명은 이해를 돕지만 공간의 인상은 기억을 남긴다. 그래서 도시의 자산을 살린다는 말은 결국 그 자산이 사람들 앞에서 어떤 표정으로 드러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한다는 뜻이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한 미관이 아니다. 기억되는 공간은 우연히 생기지 않는다. 경관과 공공디자인, 외부공간의 흐름과 보행 동선, 머무름의 리듬과 야간의 표정, 콘텐츠와 공간 연출이 함께 맞물릴 때 비로소 하나의 인상이 된다. 같은 자원이라도 어떤 곳은 그저 정비된 시설로 남고 어떤 곳은 도시를 대표하는 기억으로 남는다. 같은 예산으로도 어떤 곳은 일회성 정비로 끝나고 어떤 곳은 시민이 다시 찾는 공간 성과로 이어진다. 그 차이는 바로 여기서 생긴다. 여기서 기술과 시설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새롭고 화려한가보다, 왜 이 장소에서 이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차이는 크기보다 시선에 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 공간은 표정이 생기고 무엇을 세울 것인가만 고민한 공간은 기능은 남아도 기억은 남지 않는다. 특히 오늘의 도시는 계획과 설계, 콘텐츠와 경험, 경관과 체류가 따로 움직이는 데 익숙하다. 행정은 계획을 세우고 사업은 부서별로 나뉘며 공간은 기능별로 정리된다. 그러나 시민은 그것을 따로 경험하지 않는다. 광장과 거리, 수변과 공원, 문화거점과 생활권 공간을 하나의 인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도시를 제대로 바꾸려면 계획과 설계, 공간과 콘텐츠, 동선과 체류, 낮의 풍경과 밤의 표정을 함께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 시선은 기본구상과 설계, 조성과 운영이 따로 놀지 않도록 처음부터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야 한다. 시민은 보고서의 목차를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어디에서 멈췄는지, 어디를 다시 걷고 싶었는지, 어디에서 그 도시의 표정을 느꼈는지를 기억한다.

오늘의 도시에는 문화적 공간 해석이 필요하다

문화자원과 유산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이런 차이는 분명하다. 과거에는 보존과 관리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오늘의 시민이 어떻게 경험하고 기억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유산은 먼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도시 안에서 다시 만나야 할 존재가 되었고 공간은 그 만남이 일어나는 무대가 되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과거를 화려하게 꾸미는 연출이 아니라 그 자산의 뜻과 결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세우는 문화적 해석이다.

다시 말해 오늘의 도시에 필요한 문화는 콘텐츠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산을 읽고 경험을 만들며 공간을 통해 도시의 표정을 다시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오늘의 도시는 해설문보다 먼저 도착하는 감각을 필요로 한다. 장소의 의미는 문장에만 머무르지 않고 걷는 흐름과 머무는 감각, 공간의 결 속에서 다시 읽혀야 한다.

이 해석은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장소의 의미를 읽고 도시가 가진 고유한 자산을 구조화하며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걷고 머무를지를 설계하고 그 위에 콘텐츠와 경험을 얹어 실제 인상으로 남게 해야 한다. 문화는 더 이상 전시의 안쪽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광장과 거리, 수변과 공원, 원도심과 문화거점 같은 도시의 바깥 공간으로 나와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점은 새로운 지방정부가 출범하는 지금 더 중요해진다. 새로운 지방정부가 무엇을 내세웠는가 못지않게 그 지역이 이미 가진 자산을 어떤 표정으로 시민 앞에 다시 드러낼 것인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도심이든 수변이든 문화거점이든, 혹은 공원과 광장, 생활권 공공공간이든 시민이 먼저 기억하는 것은 사업명보다 공간의 인상이다. 그래서 지금 지자체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구호가 아니라, 이미 가진 자산을 시민이 다시 걷고 머물고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의 구조로 바꾸는 시선이다.

도시를 남기는 힘은 장면에 있다

결국 도시의 미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될 인상으로 바꾸는가에 달려 있다. 도시가 약한 이유는 자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자원을 도시의 표정으로 바꾸는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의 도시 전략은 시설을 하나 더 세우는 일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시설과 거리와 풍경이 어떻게 하나의 경험으로 연결되는가, 그리고 그것이 시민이 체감하는 공간 성과로 어떻게 남을 것인가까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오래 머물게 하고 다시 찾게 하며 도시의 이미지로 어떻게 축적되는가에 있다.

문화자원은 많은데 명소는 부족한 시대다. 이 말은 자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원을 살아 있는 공간의 인상으로 바꾸는 문화적 시선과 실행력이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도시의 경쟁력도 결국 여기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다시 걷고 싶어 하는 거리, 다시 머물고 싶은 광장, 다시 떠올리고 싶은 수변과 원도심의 표정을 가진 도시가 오래 남는다. 그런 인상은 행정의 설명보다 강하고 시설의 숫자보다 오래 간다.

도시는 선언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걸었던 길과 머물렀던 장소, 한순간 오래 남은 풍경을 통해 도시를 기억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시설이 아니다. 사람이 다시 걷고 머물고 기억하게 되는 공간의 표정을 만드는 일이다. 도시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시설이 아니라 장면이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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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공간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 지역문화자원을 경험 콘텐츠와 디지털 공간으로 구현하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현재는 경관연구소 아랑과 함께 도시장면 설계팀 ‘명경(名景)’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창근 헤리티지랩 디렉터

Heritage LAB 소장ㆍ예술경영학박사(Ph.D.)
예술-기술 칼럼니스트 & Media-Art Director
지디넷코리아 고정 필진 [이창근의 헤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