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의 행동에 참여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I deeply regret my participation in the board’s actions).”
샘 알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해임을 주도했던 일리야 수츠케버가 올린 글이다. 수츠케버는 알트먼이 마이크로소프트로 가기로 했다는 사실이 공식 발표된 직후 자신의 X에 이 글을 올렸다.
처음 이 글을 접하는 순간엔, “이거 뭐야, 미친 X 아냐”란 생각이 들었다. 사흘 간의 ‘오픈AI 드라마’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사였다.
더 이해되지 않는 건 그 다음이었다. 오픈AI 직원 86%가 서명한 ‘이사회 퇴진’ 성명에 수츠케버도 이름을 올렸다. 쿠데타 주동자 중 한 명이 ‘쿠데타 주도 세력 퇴진’ 요구 문건에 서명한 셈이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정서불안 상태에 빠진 사춘기 학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처음부터 다시 곱씹어 봤다. 독특한 기업 구조와 구성원. 일반적인 비즈니스 관점으로 오픈AI를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쩌면 수츠케버의 모순된 행동이 이번 사태를 가장 잘 설명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효율적 이타주의'가 지배했던 오픈AI 이사회
이번 사태 직후 1985년 스티브 잡스 해고 사건이 소환됐다. 존 스컬리의 친위 쿠데타와 비슷한 사건이란 게 초기 분석이었다.
그런데 감춰져 있던 내용이 공개되면서 잡스와 스컬리 이름은 사라져버렸다. 그 때의 애플과 지금의 오픈AI는 성격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오픈AI는 기본 성격이 비영리기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회의 임무도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일반적인 의무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알트먼 해고 이후 초래된 혼란을 이해하기 위해선 오픈AI의 기업 구조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오픈AI 이사회는 6명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 3명은 회사 내부 인물이다. 이번 사태로 쫓겨난 샘 알트먼과 사표를 던진 그렉 브록먼, 그리고 이번 사태를 주도한 일리야 수츠케버가 사내 이사다. 여기에 아담 단젤로 쿼라 CEO, 로봇 공학자 타샤 맥컬리, 조지타운 전략담당 이사 헬렌 토너 등 외부 이사 3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사태 직후 기즈모도를 비롯한 외신들은 “알트먼과 브록먼을 제외한 나머지 이사들은 전부 ‘효율적 이타주의자들(Effective Altruists)’이라고 평가했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란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 부자가 된 뒤, 그 돈을 좋은 일에 기부하는 것이 인류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뉴욕타임스는 일리야 수츠케버는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아니고, 그들의 가치에 동조하는 정도라고 소개했다.)
따라서 이들에겐 챗GPT를 비롯한 생성AI로 돈을 버는 것 못지 않게, 그 기술이 인류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두 개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인류를 위한 기술’ 쪽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기엔 알트먼의 최근 행보는 조금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해임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을 것이다. 그래서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의 가치에 동조하는 인물 중 유일한 사내 이사인 수츠케버가 총대를 매었을 가능성이 많다.
■ 'AI 4대 천황' 제프리 힌튼의 수제자였던 수츠케버
여기까지는 다들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샘 알트먼(과 그렉 브록먼)의 손에서 (오픈AI) 핸들만 빼앗으면 될 것이라 판단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자칫하면 회사가 송두리째 망가질 상황에 처하게 됐다. 게다가 처음 의도와 달리, 알트먼과 브록먼이 마이크로소프트 우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투자를 받긴 했지만, 경계 대상일 수밖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날개를 달아준 상황이 됐다.
노회한 기업가와는 거리가 먼, ‘뛰어난 인공지능 연구자’인 일리야 수츠케버에겐 이런 상황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수츠케버는 ‘AI 4대 천황’ 중 한 명인 제프리 힌튼 교수의 수제자다. 힌튼의 지도로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힌튼 교수와 함께 창업했던 DNN리서치가 구글에 매각되면서 한 때 구글에서 일했다.
그는 딥마인드와 데미스 하사비스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알파고 관련 논문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덕분에 수츠케버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가 선정한 ‘30세 미만 혁신가’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수츠케버는 2015년 구글을 떠나 오픈AI에 합류했다. 당시 구글은 오픈AI가 제시한 연봉의 두 배를 주겠다고 했지만, 수츠케버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당시 수츠케버를 움직인 동력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AGI 개발’이라는 꿈과 비전이었다. “인류에게 혜택을 주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AI를 훈련하는 것”이 그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 뉴욕타임스는 왜 오픈AI 이사회도 승리자라고 했나?
이런 배경을 깔고 오픈AI 사태로 다시 돌아가보자. 챗GPT 출시 이후 승승장구하던 오픈AI는 지금 좌초 위기에 내몰렸다. 어설프게 쿠데타를 꾀했던 이사회는 사면초가 상태다. 직원 대다수가 등을 돌려버렸다.
그렇다면 오픈AI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이사회는 이번 사태의 패배자일까? 더불어 ‘제프리 힌튼’의 수제자이자, 촉망받던 AI 연구자였던 일리야 수츠케버 역시 패배자일까?
알트먼이 마이크로소프트로 가기로 했다는 뉴스가 나온 직후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태의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 분석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에서 뉴욕타임스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최대 승자, 오픈AI를 패자로 규정했다. 여기까지는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가 정말 승자이냐는 부분에 대해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오픈AI가 망가지면 영리법인에 투자한 130억 달러도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핵심 인력을 흡수한 부분이 기업 이미지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주장 역시 새겨들을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런데 뉴욕타임스는 ‘AI 위험 경고자’와 ‘효율적 이타주의자들’도 승자라고 규정했다. 이번 사태를 통해 AI가 초래할 위험을 만천하에 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오픈AI 내에서 알트먼을 따라 이탈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경우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오픈AI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인류에 도움되는 AI 기술을 찬찬히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선 이참에 초심으로 돌아가 느리지만 차근차근 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면 엉성하기 그지 없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그래도 자그마한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런 판단 때문이다.
■ 수츠케버의 우왕좌왕 행보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들
그래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쿠데타 직후' 수츠케버가 보여준 모습이다. 그는 왜 “이사회의 행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을까?
뉴욕타임스 기사에 이 의문을 풀 실마리가 담겨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일리야 수츠케버 오픈AI 최고과학자는 효율적 이타주의자는 아니다”고 소개했다. 다만 그는 “효율적 이타주의자들과 비슷한 두려움 때문에 이번 행동을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반면 타샤 맥컬리와 헬렌 토너는 효율적 이타주의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 기사 분석이 정확하다면, 쿠데타 직후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준 수츠케버의 행동이 조금 이해된다.
효율적 이타주의자들 입장에선 알트먼으로 대표되는 ‘영리추구파’를 완전히 도려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그들의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효율적 이타주의 동조자' 수준인 수츠케버는 다를 수 있다. 그는 이번 사태로 오픈AI가 망가지는 것까진 원치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알트먼 해임 이후 수츠케버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사태가 진전됐다. 기업가보다는, 과학자에 더 가까운 수츠케버로선 감당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이번 사태로 유망기업 오픈AI가 망가지고, 기업 가치가 폭락하게 되면 이사회에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오픈AI 기업 이념은 이사회의 최우선 임무를 ‘주주 이익 극대화’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사회는 “범용인공지능(AGI) 기술을 개발하는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도록 한다”는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했을 따름이다.
그런 관점에선 오픈AI 이사회 역시 이번 사태의 패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게 뉴욕타임스의 분석이다. 일반적이진 않지만, 나도 이런 해석에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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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직원들은 왜 이사회와 수츠케버 대신 알트먼의 손을 들어줬을까? 그가 조직 내에서 신망이 두터워서?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알트먼은 왜 두터운 신망을 얻었을까?
나는 '효율적 이타주의'는 보통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쑥 불쑥 고개를 드는 욕망을 계속 억눌러야만 하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들과 달리, 생활인들에겐 그게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